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파 Dec 04. 2019

산티아고 가는 길 - prologue

목적 찾기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나는 길’


  가이드북의 홍보문구에서도 보았고 여행 중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산티아고 길을 걷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난 왠지 저 문구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곳'에 가지 않으면 자신을 찾을 수 없나? 지금 이곳,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는 자신을 찾을 수 없나? 지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조차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는데, 고작 한 달 여동안 걷는 여행만으로  ‘자신’을 찾는다는 건 생에 대한 무례함이고 오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자신 찾기’는 내 까미노의 목적에서 제외했다.


  퇴사한지는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엑스 보스는 마치 장기 해외여행을 위해 내가 그만두는 것처럼 퇴사 후에 미국 여행 갈거니, 유럽여행 갈거니 물어봤었지만) 외국 여행에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된 데다 몇 달간의 백수생활과 집순이 짓은 놀랍도록 적성에 딱 맞아서 '일에 지쳐 순례길에서 힐링하려는 젊은이' 같은 코스프레는 누가 봐도 자기기만이었다.


  물론 일에 지쳐있던 건 사실이지만 백수로 몇 달의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며 뒹굴 거리는 동안 많이 치유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외국까지 가서 한 달 넘게 걸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늦봄 내내 가슴 한구석에 계속 얹혀있었다.


  난 정신 놓고 걷고 싶었다. 걷기 위한 걷기가 하고 싶었다. 출근길에 걸으면 업무 시작 전에 샤워도 해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한다. 퇴근길에 걸으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배가 너무 고파 한 시간 이상 걷기가 힘들다.(그리고 밥과 술을 같이 먹고 부른 배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드는 게 행복인 나에게, 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어딘가에 들러 밥과 잔술 조금 먹고 나오는 건 제대로 된 저녁식사가 아니다.) 나에겐 밥 먹고 걷고 샤워하고 쉬고 나면 모든 게 끝나는, 그런 걷기가 필요했다.


  굳이 산티아고일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본떠 만들었다는 ) 여러 둘레길들이 있는데?


  일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떠올랐다. 나의 전문성은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그저 내가 미혼, 젊은,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나를 깎아내리고 수없는 말의 칼로 나를 상처 주던 사람들.


  말이 너무 잘 통하는 동네, 이를테면 한국의 시골 같은 곳은 걸으며 만난 사람과 이야기하다간 10분 안에 내 신상과 과거, 연애사, 결혼 안 한 이유까지 모두 탈탈 털리고, 전혀 듣고 싶지 않은 ‘내가 살아보니까....’로 시작하는 조언을 동물 모양 차량방향제마냥 끄덕거리며 듣다가 종국에는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자기 자랑까지 듣게 된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말 통하지 않는 외국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 같은 ‘꼰대 기피자’에겐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


  거기에 지금이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시기라는 것. 780킬로미터를 한 달 동안 걷는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남은 생에 거의 없을 거라는 것.


.... 같은 희미하고 헐렁한 이유를 내 까미노의 목적으로 삼기로 했다. 


  지금이 제일 젊기 때문에, 지금이 (그나마) 시간과 돈이 되기에, 난 단지 그 이유만을 들고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9월 3일 일출 무렵의 암스테르담-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