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푸르다. 그리고 어린이는 자란다.
재작년 겨울의 초입에 태어난 내 남동생의 작은 아이는 이제 한국 나이 세 살, 개월 수로는 18개월이 되었다. 신생아는 애초에 지났고, 간단한 단어 한 두 마디를 간신히 하는, ‘영유아’ 단계가 되었지만, 인지능력과 체력이 굉장해서 얼마 전부터 나는 이 아이를 ‘어린이’라고 부르고 있다. 돌이 지나기도 전에 거꾸로 컵을 쌓는 유아용 장난감을 마스터했고 음악이 나오는 장난감 자동차 버튼을 꾹꾹 눌러보다 충전이 안 된 것 같으면 충전기가 있는 곳에 가져가고선 주변 어른의 손을 잡아끌어 충전을 시킬 정도니, 말까지 하게 되면 장난감 만지고 놀면서 다음 장난감 대령하라며, 부장님 대리 부리듯 나를 부려댈게 눈에 훤하다.
어느 봄, 동생과 올케와의 식사 자리에서 둘의 임신소식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이미지는,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서 아장아장 걷는 작은아이의 신발이었다. 아이가 걸을 때쯤이 되면 꼭 벚꽃놀이를 가야겠다, 떨어진 벚꽃을 밟으려고 한발 한발 꼼꼼히 걷는 그 모습을 꼭 보고야 말리라고 다짐했었는데, 야속한 팬더믹의 세상은 그걸 쉽게 허락해주질 않았다. 4월의 벚꽃은 놓쳤지만, 5월엔 어린이날이 있었고, 나들이를 못한다면 선물이라도 줘야겠다며 혹시라도 비싼 선물을 거절할까 봐 동생을 반협박해서 유아용 자동차를 배송시켰다.
그렇게 자동차 배송을 기다리며 함께 보낸 어린이날은 참 아름다웠다. 늦은 아침을 먹고서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아장아장 걸을 나이의 이 어린이는 마치 불도저마냥 빠르게 뛰다가, 넘어지고, 일어나서 또 뛰고를 반복했다. 오래도록 상상해왔던 천천히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그 앞이나 뒤에서 천천히 바라보며 따라 걷는 아름다운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다.
걸어도 되는걸 왜 뛰냐고 물어보면 ‘길이 있으니까 뛰는 거지요’라고 인자하게 웃는 산속에 사는 달인 같은 모습으로, 어린이는 꾸준히, 한결같이 달렸다. 정작 뛰는 사람은 안 지치는데 혹시 호숫가로 갈까 봐, 산책 중인 다른 집 아이나 강아지에게 덤벼들까 봐 염려되어 쫓아다니는 사람이 더 지치는, 희한한 산책이었다. 걷다가 지치면 태우려던 유모차는 아이가 전혀 타려고 하질 않아 마치 손에 달린 키링마냥 달랑거리며 두 어른 사이를 번갈아 끌려다녀야 했고, 나와 올케는 그렇게 1시간도 안되어 산책을 끝내고 동생의 집에 돌아와야 했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며 동생 부부는 집 청소를 시작했다. 뭐라도 도와줄까 싶어 어정쩡하게 손을 내민 시누이에게, 올케는 애만 잘 보고 계시면 된다며 구석에 있는 작은 방으로 우리 둘을 집어넣었다. 장난감이라도 있으면 그거라도 붙잡고 한 시간, 두 시간씩 놀 텐데, 내가 가끔 들러 자는 손님방이라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방 밖으로 나가겠다고 떼쓰면 어쩌나 하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청소기 소리에 겁을 먹은 아이가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이거구나' 싶어 "고모도 무서워" 하며 아이를 꼭 안으니 더 깊이 내 품으로 파고든다. 내 귀와 어깨 사이에 머리를 대고서, 내 쇄골에 입술을 대고 숨을 쉬는 아이의 머리칼은 창에서 통과해 비치는 햇살을 받아 갈색으로 일렁였다. 남동생과 뚝딱뚝딱 조립해 대령한 자동차에 첫 탑승한 모습보다도, 내가 준 밥을 처음으로 뱉지 않고 꼭꼭 씹어 먹었던 모습보다도, 내 기억에 오래 남은 순간이었다.
유복하지 않았던 탓에 어린이날에 커다란 선물을 받기보단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박물관이나 공원을 가는 것이 전부였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부터 나에게 어린이날은 선물을 받는 날이 아닌 그냥 ‘한 번 더 쉬는 빨간 날’ 정도였다. 가깝게 교류하는 사람 중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나에게도 어린이날은 ‘어린이’ 날이 되었다. 앞으로도 10년은 넘게,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오래, 나의 '첫 어린이'와 함께 할 나의 두 번째 어린이날들이 가슴 뛰게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