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부평초 같은 사람 같아.”
그냥 지나가면서 툭 던져진 말이 가슴에 날아와 꽂힌 기분이었다. ‘부평초 같다니?’ 라는 어이없음과 ‘부평초 같긴 해’라는 납득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까 싶은 마음에 어이없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얄팍한 뿌리 같은 가족에 대한 나의 마음과 고1 기숙사생활부터 집에서 나와 떠돌아다닌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또 납득이 되었다. 그래, 난 부평초 같은 사람이구나.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구나.
부평초는 다른 말로 개구리밥이라고 한다. 여름철 연못이나 논가, 저수지 얕은 부분에 새끼 손톱 정도의 크기로 쩨깐하게 우글우글 모여 초록빛이 되는 그 풀이다. 나는 시골 사람이라 자주 보았던 풀이다. 올챙이가 먹는 풀이라고 개구리밥이라는 이름이 있다는데, 실제로 올챙이가 먹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다만 논둑을 걷다 보면 부평초 그늘 아래에서 내 발걸음에 놀라 우수수 흩어지며 헤엄치는 올챙이들을 더러 보긴 했었다.
나에게 부평초란 얕은 뿌리로 둥둥 떠다니는 풀이다. 나 또한 그렇다. 뿌리, 즉 가족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내 얼굴에 침뱉기 같아서 창피하다. 하지만 이 뿌리가 사춘기 이후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말해보려 한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낳아준 엄마도 길러준 엄마도 나를 두고 본인의 인생을 찾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같은 여성의 관점에서 너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기에 원망의 마음은 들지 않는다. 다만 나의 마음 속에는 어떤 공허함이 있다. 가족애나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에 대해 ‘헹, 그거 대단한 것 아니던데?’라고 비꼬게 되는 삐뚤어진 부분이.
이 뻥 뚫려 삐뚤어진 부분은 내 사회생활을 아주 곤란하게 만든다. 고마운 일을 고맙게 여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저 사람 나에게 뭘 바라나? 난 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럼 갚을 수 없는 빚이 되기 전에 얼른 갚자.’ 라고 생각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내 얄팍한 자아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나에게 왜 이렇게 잘 해주지? 나를 놀리나?’ 라고 생각한다. 24살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한 학생이 나에게 “선생님이 이러저러해서 좋아요.”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수행평가 점수 올려주지 않아.” 하고 웃으며 장난으로 넘겼다. 그러자 그 학생이 “선생님은 왜 항상 칭찬을 칭찬으로 안 받아주세요?”라고 물었다.
그러게, 왜일까? 그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학생이 처음에 칭찬한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 학생의 의문이 가득한 어조와 복도 창 밖에서 쏟아지던 햇살만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 질문은 지금까지 내가 ‘겸손’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건 ‘겸손’이 아니었다. 삐뚤어진 공허함이 내뱉는 자기 방어 였을 뿐. 난 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20대부터 이어졌던 어른의 사춘기는 30대에도 이어졌다. 30대 초반에는 부평초같다는 가시가 가슴에 박혀 나를 까슬하게 만들었다. 남들에게 다 있는 뿌리가 나에게만 없는 것 같고, 그게 열등감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좋은 분위기의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났고 나는 아니니까 그게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 ‘온실 속 화초는 모르는 잡초만의 삶이 있어. 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거야.’ 라고 정신승리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한 한계는 곧 외부에 대한 가시로 이어졌고, 나는 그 과정 속에서 또 다른 상처를 쌓아갔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접어들면서 그러한 마음은 많이 없어졌다. 단순히 나이를 들어서는 아니다. 시골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사는 도시노동자의 삶이 길어지면서 나만이 부평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을 주기로 이사를 가고, 몇 년을 주기로 이직을 하고, 친했던 사람들도 쉽게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다른 사람들도 고향은 따로 있고 서울로 올라와 혼자 나와 비슷한 삶을 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와 비슷한 부평초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도 가족애, 고향, 신념이라는, 나에겐 없는 뿌리를 모두 혹은 대단하게 가지고 있진 않았다. 설혹 그런 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서울의 생활이라는 흐름을 타고 둥둥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 5시 구로디지털단지 역 앞에 서있으면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타인의 삶을 멋대로 관찰하여 멋대로 정의하는 것이 매우 실례이기 때문에 이런 감상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더 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흐름을 타고 있는 부평초들이 아닌가. 인생에 대해 어떤 목적 의식이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어딘가로 흘러가고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고 인생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는 부평초가 맞다. 부평초인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얕은 뿌리로 냇물에 흐름에 휘말리고 어느 논둑에 걸려 정체되더라도 그게 삶이라면.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뿌리가 부러웠고 나 또한 어딘가 뿌리를 내리고 거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젠 흐름이 내 고향이자 뿌리이자 집이다. 나는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는 개구리밥이다.
개구리밥으로 살아가는 나를 긍정하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모성애’ ‘본능적인 사랑’과 같은 단어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런 것은 없다고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면, 서로의 잎이 스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할까? 그건 뿌리가 있건 없건 목적지가 있건 없건 상관없는 일이다.
잎이 스치고 인연이 만들어지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는 것 또한 삶의 흐름이 아닐까. 떠다니는 부평초도 논둑에 걸려 정체되어 있는 부평초도 저들끼리 우글우글 모여 붙어있다. 나와 같은 부평초도 누군가의 눈길에 닿을 수 있고, 잎이 부딪혀간다는 사실은 결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기하게 만든다. 행여 그 사랑이 얄팍하여 금방 떠나가더라도 상관없다. 나도 얕은 뿌리를 가지고 얕고 깊은 사랑을 반복할 테니까.
결국 인간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고 나 또한 무언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