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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인 Nov 20. 2024

코스가 아닌, 뷔페가 된 노래들

아이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나만의 방법

80년대생이라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동네 레코드숍이 있을 것이다. 유리벽을 다 덮을 만큼 붙여진 가수의 브로마이드와 조그맣게 써놓은 신보 소식.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 언제 나오는지 힐끔 바라보곤 했다. 테이프라면 오천 원, CD라면 만 원을 들고 레코드숍을 기웃거리던 유년 시절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새로 산 앨번의 비닐을 뜯고, 케이스에서 가사집을 꺼내 읽는다. 마치 코스 요리의 메뉴판을 읽듯 천천히.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앨범을 한 번 듣는다. 그 이후에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 맛있는 음악을 소화한다. 마음에 든 타이틀곡이 있으면 한 곡 반복으로 수십 번을 듣다가 앨범 전체를 반복하며 듣는다. 유독 좋은 멜로디나 가사가 있으면 작곡은 누가 했는지 작사가는 누구인지 체크해 이들이 만든 다른 곡도 찾아본다.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CD에 흠집이 날 때까지 듣고 나면 앨범에 대해 평가한다. 첫맛과 끝맛이 다른 것처럼,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와는 달라져 타이틀이 아닌 곡을 더 사랑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익숙해져 더 이상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될 때쯤 다른 가수의 새 음반을 사기 위해 레코드숍을 향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런 식의 음반 구매는 때론 실패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렸을 때 가장 분노했던 것은 드라마 <마지막 승부> OST 앨범이다. 그 앨범에는 김민교가 부른 드라마 메인 주제곡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어딘가 하소연도 할 수 없고 환불할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발견도 있었다. 자화상이나, 내추럴 같은 가수는 우연히 레코드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반해 구매했고, 또 무척이나 만족하며 들었던 앨범이 되었다.


 그렇게 늘 음악을 달고 살던 나는 고등학생 때 윈앰프로 직접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B의 사랑고백’이라는 콘셉트로 타이틀곡이 되진 않았지만 좋았던 사랑 노래를 중심으로 라디오 방송을 자주 진행했고, 꾸준히 들어주던 누나 형들이 채팅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채팅방에서 추천받은 음악도 들으며 새로운 가수를 알아가기도 했다. 데미안 라이스와 브레드, 산타 에스메랄다 그리고 흘러 흘러 쳇 베이커까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코스 요리를 먹듯 차곡차곡, 그렇지만 꾸준히 테이블 위에 새로운 모습으로 올라왔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서른에서 마흔까지 십 년간은 음악을 별로 듣지 않았던 시기다. 그래서 2010년대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 것도 같다. 기억을 함께하는 대표하는 곡이 없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 노래와 함께 추억할 이들도 없어서 그렇다.


그리고 이제는 유튜브 프리미엄과 애플뮤직, 스포티파이 등 음악 스트리밍을 잘하는 플랫폼이 익숙해졌다. 나야 젊은 날의 기분으로 추억의 노래가 문득 떠오를 때마다 찾아 듣고는 하지만, 그런 백그라운드가 없는 아이는 어떤 음악을 듣게 될 것인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고민했다. 슈퍼스타K6의 우승자인 곽진언은 포크를 자신만의 언어로 완성해 경연 내내 큰 인기를 끌었다. 포크를, 그것도 한국식 포크를 주로 하기에 어려서 같은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인터뷰에서 부모님이 클래식을 가장 많이 들려줬다고 한다. 물론, 자신도 고전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앨범 하나를 천천히 소화하며 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었다. 신승훈은 5집에서 맘보를 처음 들려줬고, 패닉은 기괴한 동화를 만들기도, 유희열은 코발트블루 빛 목도리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는 시낭송(?) 같은 것도 기억하게 했다. 메뉴판을 집어 들면 알아서 내 테이블에 놓이던 노래들은 이제 아이에겐 없다. 아이는 스스로 뷔페식당에 들어가 차려진 음식을 둘러보고 자신이 먹을 만큼만 접시에 떠다 와야 한다. 온 세상 음식이 다 놓여 있으면 그나마 다행. 대부분의 맛있는 메뉴들은 주방장에게 슬쩍 언급해야 저 어딘가에서 내어준다. 그래서 나는 그 말 많은 뷔페 손님의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고부터 아이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이태리 가곡, 정석원의 첼로 연주를 듣고 ‘볼라레’를 다양한 버전으로 즐겼다. 바순이라는 악기를 사랑했고, 성악가 김동규 버전의 볼라레가 나올 땐 덩실 춤을 췄다. 야구장에서는 LG 응원가가 흘러나올 때 안드레아 보첼리의 ‘멜로드라마’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사를 오며 본가에 있던 음반을 모두 가져왔다. 내가 수집한 음반을 들으며 아이는 이제 90년대 가요에 관심을 가진다. 최근에 가장 입에서 많이 흥얼거리는 건 이승훈의 ‘비 오는 거리‘. 사랑한 건 너뿐이야. 꿈을 꾼 건 아니었어. 그렇게 “그래, 맞아. 그랬지.” 하면서 아이와 함께 몇 번이고 그 노래를 즐긴다. 언젠가 아이의 식성이 생기며 내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받아먹지 않는 날이 올 지라도, 나는 계속 “이것도 먹어볼래?”하며 새로운 메뉴를 찾아 아이 앞에 가져가리라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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