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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Jan 08. 2018

[19] There is no there there.

2부-강원도 속초

여행이 좋은 이유, 나의 경우는 이렇다. 여행 중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 나는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상냥하고, 용감하고, 부지런하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공감하고, 공정하다. '이곳'의 나와 '그곳'의 내가 다른 이유에 대해, 내가 여행지에서 다른 사람의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는 원래가 그런 사람인데 '그곳'에 있어야 나의 참 모습이 발현되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비참하게도 이중적이기 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하여간 그렇다. 그곳에서 나는 상냥하고, 용감하고, 공정하고, 의연하고, 담대하며,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이, 여행에서의 내가 좋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한동안은 '더-나은-사람-최면'에 걸려 그럭저럭 잘 지낸다. 한동안 말이다. 에드가 앨런 포는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집 Twice-Told Tales의 서평에서, 모든 창작에 있어 '효과의 단일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 했다. 우리가 작품으로부터 받는 인상이나 그것으로부터 얻는 효과가 단일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이 인상의 단일성이라는 것은 장편소설로부터는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포의 주장인데, 그 이유가 장편소설은 한 번 앉은 자리에서 작품을 끝까지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손에서 책을 놓는 중간중간 세속적인 관심들이 끼어들어 작품의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하여 한번 앉은 자리에서 통독이 가능한 단편소설이야말로 가장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속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포는 주장한다. 흠, 그렇구나. 포의 주장에 어쩐지 설득 당한 나는 엉뚱하게도 나와 나의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한동안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대해 '이곳'만큼 알지 못하며, '이곳'에 대해서는 한동안 무심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다웠고, 그곳이 아름다우니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이곳 또한 아름다운 것 같다. 그곳에서 보면, 그곳에서 만난 '그들'에 비하면, 나는 내 주제에 비해 넘치도록 가진 사람이었다. 그곳의 인상이 나를 지배하는 한동안, 더 나은 사람 최면에 걸린 그 한동안은 그곳만큼 이곳이 좋다. 하지만 '책'을 손에서 놓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인상들은 퇴색하고 만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불쑥불쑥 끼어들기 때문이다. 


"회사가 어렵다고 월급을 깎겠다는데..."

(말도 안돼! 회사가 잘 될 때는 그럼 월급 더 줬고?)


"내 친구 선영이 알지? 걔가 안양에 재건축 아파트를 샀는데 두 달 만에 일이 억은 번 듯." 

(팔아야 벌지, 벌긴 뭘 벌어...)


"내 친구는 위례 팔고 개포 샀는데 십몇 억은 벌었을 걸."

(아, 듣고 싶지 않아…)


"최저시급 인상으로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경비원을 몽땅 해고했다고..."

(이런 우라질! 뒈질랜드!!)


세 달은 ‘그곳’에, 반년은 ‘이곳’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지상으로부터 일 미터쯤 동동 떠서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을 가지 않은지 한참이 되었다. 이제 어디든 가려면 남편과 함께 가고 싶어서 남편의 시간이 날 때까지 꾹 참는 중이다. 퇴근 후 나도 없고 복이도 없는 컴컴한 집으로 돌아올 반백의 남편을 생각하면 참는 것이 마땅하다. 정말이다. 나는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돈을 벌었는지 까마득할 정도로 그것을 생산하는 일에서 손을 놓았고 수 년 동안 남편 혼자 그 짐을 대면해 왔다. 


지난달 속초에 오래된 집을 샀다. 건축물대장을 들춰보지 않아도 아주 오래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오래된 집이다. 바닷가도 아니고, 마당도 없다. 마당은 고사하고 자전거 한 대 세울 자리 조차 없다. 사정이 있어 들어가 살지는 못한다. 속초 교동에 죽전의 월셋집만큼 오래된, 같은 크기, 비슷한 구조의 아파트를 월세로 구했다. 속초에서 무엇을 할 거냐고요? 한동안은 그냥 가만히 있을 생각이에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될까?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될지 생각하기에 우리 둘 다 꽤나 나이 들었지만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속초의 모든 것이 낯설다. 생활정보지 구인란에 '명태할복', '야간할복'이라는 것이 올라오고, 인터넷 속초 카페에서는 양미리 공동구매가 한창이다. 네, 맞아요, 생선, 그 양미리. 


3월 2일 우린 속초로 간다. 

속초가 ‘그곳’이길 바란다.

                              

교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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