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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Oct 05. 2016

[18] 사회주의자 게오르기_불가리아 반스코.

1부-발칸

반스코에서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주인장 게오르기는, 젊었을 때 꽤나 미인이었을 부인과 부인을 쏙 빼 닮은 이십 대 딸을 둔 호남형의 건장한 남자였다. 비록 그의 영어 실력은 우리의 불가리아어 실력처럼 단어를 나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숙소를 운영하며 쌓은 눈치와 몸을 사리지 않는 제스처 덕분에 그가 하는 말이라면 복잡한 길 찾기는 물론이고 인생에 대한 제법 거창한 연설까지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손님들과, 그러니까 여기에는 버르장머리 없고 시끄럽기만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외하고, 계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손님 또한 열외로 둔다는 등의 전제가 붙는 듯 보였지만 어쨌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그는 우리가 숙소를 들고 날 때면 매번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러면 우리는 문간에 서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에는 다 함께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회동을 마치고는 했다. 


"킴, 킴, 옛날에 어땠는지 알아? 반스코에 학교가 다섯 개나 있었어. 근데 지금은 몇 개인지 알아? 달랑 하나 남았다고, 하나."


"킴, 킴, 옛날엔 어땠냐면 말이지, 고등학교 때 말이야, 학교가 끝나면 무도회장에 가서 신나게 라끼야를 마시고 담배를 피다가, 우리 학교에 진짜 예쁜 여선생이 있었거덩? 그녀를 안고 블루스를 췄단 말이야, 이렇게, 이렇게. 잘 봐봐. 이렇게, 이렇게."


그는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하루에 한 번은 꼭 '코뮤니즘'을 대화에 올렸다. 그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것을 그리워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돈, 경쟁, 부패, 낭만, 그리고 다시 돈.


"킴, 킴, 내 말 들어봐봐. 남자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은 말이지 그 남자가 진짜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야. 알겠어? 언더스탠?"


이런 막무가내식 주장을 서슴없이 펼치는 그는 역설적이게도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의 혜택을 그 누구 못지 않게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눈밭에서 미끄러지겠다는 목표 하나로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온 외국인들을 상대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땅과 집과 재산으로 무장한 채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가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그토록 추억하는 그 시절을 당최 알 길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어땠길래?




<반스코>


설국을 기대한 우리는 초록의 땅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집에서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스키부츠를 신고 눈 쌓인 찻길을 걷는다면 꽤 힘들겠지? 게다가 스키까지 들고?


반스코의 랜드마크, 스베타 트로이쨔 교회. 소피아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이 왼성되기 전까지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면 이런 풍경. 보이나요, 산.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가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는 길, 저 앞에, 비록 일주일짜리지만, 우리'집'이 보이면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배가 고파도, 콧물이 줄줄 흘러도 식전 산책은 빼놓지 않았다. 해 짧은 겨울이니 저녁밥을 먹고 나서는 늦어버리기 때문이다.




곤돌라 리프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건물과 도로와 담벼락과 하다못해 공터의 모양새까지 볼품없어 지는 것은 스키리조트 마을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소위 '올드타운'이라 부르는 곳도 있었다.


카페트 세탁기.


시내 건너는 우리로 치면 신시가 비슷한 곳으로 아파트나 호텔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군데군데 짓다 만 흉물들도 종종 눈에 띠었다.


그 끝이 이런 모습이다.


발칸에서 공사판을 피하기란 파리에서 개똥을 피할 확률만큼 낮다.


싸고 맛있는 식당은 이 근처에 몰려 있다.


이곳은 곤돌라 리프트 탑승장 근처로, 장비 대여 가게, 수퍼마켓, 기념품 가게, 술집, 커피집, 군것질 가게 등이 죄다 몰려 있다.


하필이면 유례없는 이상고온이라고 했다.


목 좋은 자리에 개점휴업 중인 스케이트장이 있었는데 일 년 장사 망친 그들을 보며 슬로프에 뿌려대는 가짜 눈에 감사했다.


남편이 저 위 꼭대기 어딘가에서 노는 동안


텅 빈 마을을 걸었다.


기차역입니다.


기차역 주변 정비사업 중. 비질을 하고 쓰레기 통을 끌어 나르는 일은, 우리가 '집시'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그들이 도맡았다.  스키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묘지.


3월 1일은 바바 마르타'의 날로, 이날 친구와 가족들에게 빨간 실과 흰 실로 만든 팔찌를 선물한다. 팔찌는 나무에 꽃이 필 때까지 팔에 걸고 다니다가 꽃이 피면 나무에 매단다. 바바 마르타는 우리말로 '할머니 3월'. 전설에 따르면, 바바 마르타에게는 큰 딱정벌레(1월)와 작은 딱정벌레(2월)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매일 같이 술만 마시고 소란스럽게 굴어 이에 분노한 큰 언니 바바 마르타가 1월과 2월에 매서운 날씨를 주었다. 어느 3월의 마지막 날엔, 한 늙은 목동 여인이 그녀의 가축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목동은 바바 마르타가 그녀에게 좋은 날씨를 내려 줄 거란 기대했는데, 이 밑도 끝도 없는 기대는 단지 그녀와 바바 마르타가 동갑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동년배끼리 좀 봐줘, 뭐 이런. 자신이 쭈글쭈글한 목동 여인처럼 늙었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바바 마르타는 또 다시 분노하여 그 겨울의 마지막 눈폭풍을 내렸고 목동은 죽고 말았다. 3월 할머니에게 '이번 봄 잘 부탁드립니다.' 기원하고 봄이 온 것을 축하하는 바바 마르타의 날을 앞두고 큰 도시 작은 도시 할 것 없이 광장이나 공원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팔찌 노점상들이 자리를 펼쳐 놓았다. 초저녁 퇴근 시간 무렵 팔찌를 사려는 사람들의 검은 물결이 분홍색 좌판 사이에서 넘실거리는 모습은 따뜻했던 지난 계절을 기억하며 하늘을 향해 무성히 자란 나무가지들 사이에서 엉켜있는 기운 빠진 노을을 보는 것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하여간 바바 마르타의 기분이 올해는 꽤 좋은가 보다.


남편은 꽤나 서운해 했지만


성급한 누군가는 요구르트 통에 봄을 심었다.


마을 광장을 지나


집으로 간다.


게오르기.


마지막으로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이제 일본에 오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지어 내고, 그것으로 상품을 만드는 일본의 재주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관광객인 나에게는 여간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상해 보세요. 장날이 아니면 적막하기 짝이 없는 충북 어느 산골 읍내 시장, 기운 없는 할머니가 먹고 살기 위해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작은 국밥집의 메뉴판이 형형색색 알록달록 둥글둥굴 과장된 글씨체로 이렇게 써 있는 것이다. "일교차 높은 고랭지에서 배추가 힘차게 생산해 낸 믿음직스러운 시래기와 40년 국밥 달인의 만남! 그 환상적인 맛의 세계에 빠져 보세요! 도~오~조~오~" 식탁에 차려진 것은 소담스럽고 평범한 4천원짜리 시래기된장국밥일 뿐이다. 무엇이 싫은지를 알고 난 후에야 무엇이 좋은지 아는 것은, 남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깨닫고, 누가 적이었는지 가려지고 나서야 누가 동지였는지 뒤늦게 깨닫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그랬다. 발칸이 좋은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호들갑스럽지 않기 때문이었다. 발칸은 그들의 언어처럼 코맹맹이 소리 하나 없이 나지막하고 묵직했다. 


그 먼 불가리아에 세 번을 갔다. 처음에는 그 길에 있어 갔다. 아름다웠다. 두 번째는 남편에게 불가리아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싶어서 갔다. 역시나 아름다웠다. 세 번째는 남편이 또 가자고 해서 갔다. 


갈 때마다 불가리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리아가 발칸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은 아니지만 가서 산다면 그곳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릴라산 자락의 작은 마을을 점 찍어 두고 틈만 나면 불가리아 부동산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수리하면 제법 그럴 듯 하겠다 싶은 이층 주택을 오천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영어 사이트이니까 더 비싸게 팔지도 몰라. 직접 가면 더 싼 집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외국인도 불가리아에 집을 살 수 있다. 토지 없이 아파트만 구입하는 데는 어떠한 제한도 없어서 그냥 사면 된다. 토지가 포함된 주택을 구입하려면 법인을 설립해야 한다. 법인 설립에 필요한 자본금은 1유로면 되고, 등록을 대행해 주는 변호사 비용으로 300유로쯤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변호사에게 돈 주고 맡기면 끝. 동남아시아의 여느 나라들처럼 법인 설립에 현지인의 지분이 필요치도 않다. 


나는 인터넷으로 집들을 구경을 하며 어디에 이층침대를 놓고 어떻게 마당을 꾸밀지를 궁리했다. 즐거웠다. 지금에사 하는 이야기인데, 남편의 퇴직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죽전으로 이사를 하며, 여기서 딱 이 년 만 살고, 그러니까 딱 이 년 만 더 회사를 다니고 어디든 가자고 했다. 그 어디는 아마도 불가리아였다. '호스텔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릴라 호스텔은 벌써 있을 것 같은데...' 꿈꾸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비록 그것이 헛꿈일지라도. 


외국인이 불가리아에서 영리 목적의 사업을 하려면 열 명의 불가리아인을 고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풀타임으로. 끙. 그러다 작년 여름, 우연히 소피아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다는 부부를 알게 되었다. 불가리아로 이민간지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고 꽤나 유명해지기까지 한 분들이었다. ‘여행이든 이민이든 불가리아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라고 페이스북에 친절히 안내되어 있어서 다짜고짜 인사를 하고는 가장 난감한 부분인 비자에 대해 물어 보았다. "열 명을 고용할 필요 없어요. 돈만 주면 변호사가 다 알아서 해줘요. 돈만 있으면 방법은 많아요." 흠. 내가 아주 못 견뎌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안녕, 불가리아, 잘 있어,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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