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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ELYST Oct 19. 2018

교통 수단의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의 대동맥

선박


대항해시대의 선두 주자였던 포르투갈에서는 항해왕 엔리크 왕자가 조선 기술자들을 모아 캐러벨(caravel)선을 만들었습니다. 캐러벨선은 원양어선에 빠른 속도와 대포 등의 중화기를 장착하여 개조한 것으로, 당시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에게 유럽 최고의 해상 기동력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캐러벨선에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물자를 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개조하여 100톤 규모의 적재가 가능한 캐럭(carrack)선을 만들어냈습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스페인은 캐럭선의 길이를 늘리고 물에 잠기는 부분을 얇게 개조하여 갤리온(galleon)선을 개발했습니다. 갤리온선은 캐럭선에 비해 높은 안정성과 빠른 속도를 자랑했습니다.


한편, 대항해시대 최후의 승자였던 영국에서 와트(James Watt)가 1776년 증기기관을 상용화한 이래로 많은 이들이 증기기관의 다양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증기기관이 가장 먼저 활용된 곳은 탄광과 공장이었고 뒤를 이어 증기기관을 선박의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미국 태생의 풀턴(Robert Fulton)은 영국으로 건너가 운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이에 관심을 보인 미국 대사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은 풀턴을 미국으로 데려와 증기선 개발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풀턴의 증기선


마침내 1807년 풀턴은 150톤의 적재가 가능하고 범선보다 3배 빠른 증기선을 뉴욕의 허드슨강에 띄워 240㎞를 운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풀턴은 증기선의 결함을 꾸준히 개선해가며 미국의 증기선 운항을 독점해갔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해상 교통의 주요 수단이 범선인 갤리온선들에서 증기선들로 빠르게 대체되어 갔습니다. 증기선의 군사적 활용은 영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영국은 증기선의 힘을 통해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손쉽게 제압하고 홍콩과 개항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증기기관차


증기선의 개발에 뛰어들었다가 풀턴에게 선수를 빼앗긴 영국의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은 증기선의 상용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증기기관차로 관심을 넓혔습니다. 스티븐슨 이전에도 증기기관차를 만든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주행의 안정성 문제로 상용화되지는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스티븐슨은 증기기관차의 동력 장치를 개선하여 주행의 안정성 향상에 주력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선로의 개발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1825년 그는 마침내 증기기관차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증기기관차의 제작과 선로 건설을 병행하며 영국 공업화의 대동맥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스티븐슨의 'Locomotive No 1'


운송의 효율성만 놓고 보면 사실 증기선과 증기기관차는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풀턴의 증기선은 150톤의 화물을 30시간 동안 240㎞ 거리까지 운송할 수 있었고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로 90톤의 화물을 같은 거리까지 운송하는 데에는 15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히려 증기기관차의 가장 큰 의의는 해상에 집중되었던 대규모의 운송을 내륙으로 확장시켰던 데 있었습니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물자를 소비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운송할 필요가 생겨났지만 당시만 해도 내륙 운송은 마차에 의존하는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한편, 독일의 기술자 다임러(Gottlieb Daimler)와 마이바흐(Karl Maybach)가 내연기관을 만들어내고 1885년 벤츠(Carl Benz)가 이를 이용한 자동차를 만들면서 운송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내연기관이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통해 미국에 처음 소개되고 1894년 헤인스(Elwood Haynes)가 미국 최초의 자동차를 만들어내면서 미국 또한 자동차 생산의 물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발 주자였던 미국은 1908년 포드(Henry Fiord)가 세계 최초로 대량생산 체계를 도입하며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포드-T


포드는 포드-T라는 단일한 모델만을 생산했는데 자동차를 조립에 용이한 구조로 디자인하고 조립 단계의 공정을 단순화함으로써 자동차 대량생산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자동차 회사들에서는 6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연간 3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대당 3,000불 수준에 판매하고 있었던 반면 포드는 불과 1만여명의 노동자들을 통해 동일한 수량을 생산하여 대당 850불에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포드-T는 지속적으로 생산성을 개선해가며 1925년 250불까지 가격을 낮추었고 1927년까지 총 1,500만대를 판매하며 미국 자동차 시장의 50% 가량을 점유하게 됐습니다.


포드는 소비재로서 자동차의 문턱을 낮추며 보통의 미국인들이 개별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보급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시간에 맞춰 기차역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어졌고 철도가 놓이지 않은 곳까지도 이동이 가능해졌습니다.  미국인들은 자동차에 폭발적으로 호응했고 1920년대 말이 되어서는 미국인들의 20%가 자동차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동시에 자동차는 미국 최대의 산업으로 성장했고 1950년대에 들어서는 전세계 자동차의 75%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20년대 미국 전체 산업 생산의 13%가 자동차에 투입되었고 포드-T가 출시된 1908년 300억불 수준이었던 국내총생산은 1929년 대공황 직전 1,045억불 수준까지 성장했습니다.


제트기


자동차가 미국의 산업과 도시 구조는 물론 미국인들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가고 있을 때에도 해외로의 운송은 대부분 선박에 의존했습니다. 석유를 연료로 하는 내연기관이 선박에도 도입되면서 운송 효율성이 향상되기는 했으나 철도나 자동차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1934년 건조된 퀸메리호는 1,900여명을 태운 채 시속 53㎞로 운항할 수 있었고 같은 해 운행을 시작한 디젤기관차 파이오니어제퍼는 23톤의 화물을 적재한 채 시속 125㎞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


장거리 해외 운송의 발전은 제트엔진이 탄생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트엔진의 개발은 전쟁의 필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직전 영국의 휘틀(Frank Whittle)과 독일의 오하인(Hans Joachim von Ohain)은 1937년에 제트엔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운항한 것은 항공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오하인이었습니였다. 오하인이 최초로 제트기의 운항에 성공한 1939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영국 정부는 1941년이 되어서야 제트기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GE가 휘틀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제트엔진 개발에 착수하여 1942년 미국 최초의 제트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오하인(좌)와 휘틀(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 기간에 만들어진 수송기의 상당수가 민간인들의 이동과 민간 물자의 수송을 위한 민항기로 바뀌었습니다. 군용 제트기 제조에 있어 선두주자는 더글러스와 록히드였고 뒤를 이어 보잉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잉은 전후 민간 제트기 제조 분야에서 더 빠르게 움직였고 마침내 1958년 미국 최초의 여객용 민간 제트기 보잉 707을 출시했습니다. 민항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보잉은 1966년 록웰의 항공우주 부문을 인수하며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1997년 경쟁사였던 더글러스마저 인수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우주 회사로 성장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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