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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ELYST Aug 20. 2018

시카고 학파 건축

근대 부동산 패러다임의 확립

근대 이후 부동산 시장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에는 입지가 가장 우선시 되는 원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의 형성에는 크게 3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첫 번째는 산업혁명 이후 전가의 보도로 자리 잡은 생산의 효율성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효율성이란 같은 양을 생산하는 데 있어 최소한의 시간을 들이는 것, 즉 시간의 효율성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동산에 있어 이러한 시간의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교통수단과 인프라의 발전입니다. 세 번째로는 이러한 교역의 인프라가 밀집된 지역에 들어선 고밀도의 건축물들입니다.


1851년 뉴저지의 제재소에서 관리자로 있던 오티스(Elisha Otis)는 목재 부스러기를 제재소의 상층부로 옮기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호이스트를 활용한 엘리베이터를 개발해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호이스트는 고장이 잦아 안전상의 문제들을 자주 발생시켰는데 그는 자동 제동 장치를 도입해 안전상의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했습니다. 이 엘리베이터를 가지고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 오티스는 1853년 뉴욕 만국박람회에 자신이 개발한 엘리베이터를 들고 참석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관람객들 앞에서 자신이 탑승한 엘리베이터를 지탱하던 로프를 절단하는 시연을 합니다. 관람객들의 예상과 달리 성공적으로 멈추어 선 그의 엘리베이터는 그에게 전국적인 명성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오티스의 엘리베이터는 고층 건물에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엘리베이터를 시연하는 오티스


한편, 에리(Erie) 운하 건설 이후 새로운 번영의 상징으로 성장해가던 시카고는 1871년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는 시카고에 근대 건축의 새로운 실험들이 집중되기도 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출발은 제니(William Le Baron Jenny)였습니다. 당시 벽돌을 쌓아 건물의 벽체를 만드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저층부로 갈수록 벽체가 두꺼워져 공간의 효율성이 떨어졌고 창문 또한 작아지면서 채광이 열악해지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니는 1885년 Home Insurance Building에 철골 구조를 도입하여 공간의 효율성과 채광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고층 건물을 선보입니다. 뒤를 이어 애들러(Dankmar Adler), 설리반(Louis Sullivan), 버넘(Dainel Burnham), 루트(John Root) 등의 건축가들이 제니의 건축 어휘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산업화에 의한 새로운 기술들을 건축 어휘에 접목해갔고 건물의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오늘날 고층 건물의 원형을 만들어낸 이 건축가들은 흔히 시카고 학파(Chicago School)로 통칭되고 있습니다.


Home Insurance Building


그러나 균질한 양식을 표방할 것처럼 들리는 명칭과는 달리 이들의 건축 어휘는 다양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은 결국 시카고 학파를 분열로 몰아갑니다. 이들 간의 분열이 절정에 이른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였습니다. 버넘은 당시 박람회의 총괄 건축가로서 파리를 모델로 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박람회장은 '흰색 도시'로 불리며 미국 전역에 신고전주의 양식에 대한 관심과 붐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시카고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여지던 설리반의 생각은 버넘과 달랐습니다. 사실 설리반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그의 말처럼 건물의 기능과 일치된 양식을 발전시켜가는 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신고전주의는 건물의 기능이나 구조와는 어긋난 불필요한 장식에 불과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실제로 프랑스의 보자르(Beaux-Arts)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을 교육받은 것은 설리반이었고 보자르의 양식을 표방한 버넘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리반은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건물들을 두고 이로 인한 폐해가 최소한 50년 이상 갈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설리반의 학구적인 접근보다는 버넘의 감각적인 접근을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버넘이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 디씨 등의 도시계획을 수행하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설리반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전경


일반적으로 시카고 학파는 190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 경제의 이론적 기틀을 확립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자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기업의 자유 경쟁과 정부의 개입 축소를 역설했었고 자유무역과 국가 간 분업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즉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구축한 미국의 자본이 전 세계 경제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이론적 기틀을 제공해주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건축의 시카고 학파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카고 학파의 건축가들 또한 산업화의 예찬론자들이었고 그 성과의 확산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건축가들의 입장에서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일 수도 있겠지만 마천루의 탄생으로 인해 입지에 따른 부동산 가격의 격차는 더욱 커졌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확산으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확대된 것과 비슷한 결과를 불러온 셈입니다. 아마도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빠르게 성장한 신도시 시카고는 자본의 탐욕이 분출되었던 분화구였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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