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공간의 힘
김수근과 김중업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건축가를 꼽으라고 했을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김수근과 김중업일 것입니다. 이들만큼 우리나라의 건축 전반에 영향을 주었던 건축가들이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스타일과 걸었던 '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서울대 건축학과였는데, 김수근이 입학했던 당시 9살 위였던 김중업은 조교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이들의 짧은 만남이 끝나는데, 통역관으로 입영했던 김수근은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렸던 국제 예술가 회의에 참석했던 김중업은 곧바로 프랑스로 건너가 거장 Le Corbusier에 수하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각각의 스타일에 이러한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김수근이 잘게 쪼개진 단위 공간들을 치밀하게 구성하는 스타일이었던 반면, 김중업은 웅장하고 유려한 형태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의 차이가 드러난 작품이 김수근의 '공간 사옥'과 김중업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입니다. 그런데, 전도유망했던 두 건축가의 걷는 길이 달라지게 된 이유는 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 당시 정부의 도시 정책을 비판하며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난 김중업은 1971년 추방되었고, 김종필과의 친분으로 정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김수근은 남영동 대공분실 등을 설계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정치적 행보를 떠나 건축에 대한 접근 방식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면, 분명 이 둘의 스타일에는 열악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건축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뇌가 공통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겠지만, 저는 결과물만을 두고 봤을 때 김수근의 건물들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단위 공간의 기능적 구성이 훨씬 사용자에게 친화적이었고, 무엇보다 건물의 유지관리 또한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김수근의 사후인 1989년, 그가 생전에 썼던 짧은 수필들을 모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는 책이 발행되었고, 2006년에는 개정판이 발행되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한 성공한 건축가의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가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책을 덮을 때에는 그의 건축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정치적 행보에 가려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가 설계했던 건물들을 보면, 단위 공간들을 기능에 따라 배열하고 이들을 복도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길'을 먼저 설계하고 그 길의 전개에 따라 단위 공간들을 순차적으로 배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You Are Here
건축설계 실무를 하던 당시 호텔과 리조트, 그리고 리조트 단지의 마스터플랜 작업에 참여할 기회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때 항상 품고 다녔던 책들 중에 'You Are Here'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건축가 Jon Jerde의 작품집이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생소했던 형태의 쇼핑몰 Canal City Hakata를 설계한 건축가로 처음 접했었습니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다른 건축가들과 확연하게 다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샌디에고의 Horton Plaza, LA의 Universal City Walk, 라스베가스의 Treasure Island, Fremont Street Experience와 Bellagio, 도쿄의 Roppongi Hills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입니다.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공통적으로 생동감이 넘칩니다. 건물 안으로 군중을 끌어들이고 그 주변에 단위 공간들을 배치한다는 점에서 아트리움 호텔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결과물에 나타나는 생동감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아트리움 호텔이 거대한 스케일의 폐쇄적인 내부 광장을 만들고 그 주변으로 호텔 시설들을 배치하는 것에 비해, Jerde의 쇼핑몰들은 건물 내부에 개방적인 '길'을 친숙한 스케일로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점포들을 배치합니다. 즉, 아트리움 호텔이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이라도 한번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면, Jerde의 쇼핑몰은 걷다 보니 어느새 건물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Jerde는 길에 스토리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디자인을 풀어갔고, 단위 공간의 기능 배치와 디자인은 스토리 전개에 따른 경험을 제공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건물 또는 단지 안에 위치한 단위 공간들이 마치 전혀 다른 건물들인 것처럼 다른 형태와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활기찬 도심 상업지역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부담 없는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그의 각본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Jerde는 김수근과 마찬가지로 길이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수근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길을 디자인의 모티브로 했고, 이 접근법이 지닌 상업적 잠재력을 십분 활용했던 것입니다.
쇼핑의 과학
물론, Jerde의 디자인 접근법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문학적 소양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길의 '스토리'가 건물의 생동감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그런 문학적 소양이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검증된 Jerde의 접근법을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당시 종종 들렀던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을 통해 '스토리'에 조금 더 익숙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환경심리학자 Paco Underhill의 저서 '쇼핑의 과학'은 쇼핑몰에서 소비자들이 보이는 행태에 나타나는 규칙을 찾아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오래 전부터 환경심리학자들은 도시나 건물과 같은 인공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의 행태에 나타나는 규칙을 찾아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구를 진행해왔고, 건축과 관련해서서는 'Pattern Language'라는 걸출한 이론서에 이러한 규칙들이 집대성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Underhill의 저서는 쇼핑몰이라는 상업적 환경에서 소비자들이 보이는 행태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당시 고민하던 문제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씨름하던 문제와 같이 강력한 동기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 책을 그렇게 몰입해 읽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매뉴얼에 가까웠던 책 덕분에 최소한 소비자들의 동선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Jerde의 접근법을 이제 겨우 '실험'해본 결과물이 실제로 기대하는 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의 추진 여부를 직관만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다시 고민이 깊어지던 중, Space Syntax 이론에 기반한 소프트웨어를 소개받으면서, 실험에 대한 검증까지는 아니더라도 결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시뮬레이션은 가능해졌습니다.
좋은 계획과 디자인 없이 성공의 '길'을 걷게 될 확률은 극도로 낮습니다만, 좋은 계획과 디자인이 항상 성공의 길로만 안내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Jerde가 설계한 주상복합, 업무시설, 호텔, 상업시설 복합 건물이 2011년 '디큐브시티'라는 이름으로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사업의 시행자였던 대성산업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 진출했던 백화점 사업에서 철수해야 했고, 무리한 차입으로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면서 업무시설, 호텔, 상업시설을 매각해야 했습니다. Jerde가 그동안 보였던 것들에 비하면 이 프로젝트의 디자인에 아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성공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운영 및 금융 구조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성공적인 결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들의 균형이 끝까지 적절하게 유지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