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치료사 박민근이 들려주는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수현 씨는 삼 년 동안 무려 7번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7번째 낙방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희망도, 의지도, 돈도 세상에 다 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한 기관의 도움으로 공시생들에게 무료 상담을 해준 적이 있다. 100명이 넘는 공시생을 만나며 그들의 아픈 사연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 대부분은 짧지 않은 수험생활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또 대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수현 씨도 그때 만났다.
청년의 성장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회 풍토가 그들을 사지로 몰고 있다. 고학력 청년 수에 비해 양질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있다. 사회 전반에 퍼진 경쟁 담론이 청년들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 청년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생존과 안정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무원 시험은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개인의 심리는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다. 내가 공시생들을 만나며 목격한 상처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적 문제,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다. 고시공부보다 힘겨운 건 한 끼의 밥, 수험서 한 권을 사는 비용이었다. 내가 만난 공시생 중에는 하루 5천 원으로 버티는 이도 있었고, 컵 밥조차 호위호식이라며 라면 한 그룻, 삼각 김밥,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조사에 따르면 공시생 가운데 70퍼센트 정도가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다섯 번 가까이 개인 상담과 집단 상담을 같이 했던 수현 씨 역시 우울증이 심했지만, 오히려 나약한 자신을 자책하고만 있었다. “정신력 부족”이라며 자신을 벼랑 끝까지 내몰고 있었다.
“정말 이런 제가 한심해요. 아버지, 어머니는 땡볕에서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하시는데, 저는 시원한 독서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잖아요.”
- 아니에요. 수현 씨. 보여주신 성적표를 보니 그동안 얼마나 피땀 흘려 공부했는지 그 노력이 여실히 나타나는 걸요. 다만 운이 나빠 아직 합격을 못했을 뿐인 걸요.
“저 같은 놈, 자꾸 그렇게 위로하지 마세요. 나약한 생각만 들게 만들어요.”
공시생들의 심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 만든 깊은 절망과 불안, 우울감으로 힘들어했다. 무기력 탓에 자신이 계획한 학습 스케줄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때문에 다시 자책과 자괴감의 악순환에 시달렸다. 몇 번의 낙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인생을 건 모험이 좌초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낙방 경험은 큰 상처가 되었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그럴수록 더 불안했고, 더 큰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또, 사회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사람에 대한 혐오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특히 수현 씨는 마지막 낙방의 상처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량진에는 저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요. 전 그 사람들 얼굴만 보면 금방 알아요. 그중에서도 저는 최악이고요.”
-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자신을 비하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해요. 자신을 비하하는 것도 습관이 되고, 그런 생각습관이 우울과 불안을 더 키우는 법이거든요.
“읽어보라고 하셨던 책은 아직 읽지 못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하루에 한 시간 걷기를 해보려고 노력은 했어요.”
- 어떠셨어요. 도움이 좀 되던가요?
“처음에는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 사람에게 무슨 운동을 하라고 하나 반감이 컸죠. 사실 공부도 안 하고 종일 한심하게 스마트폰만 보고 있긴 하지만요. 하지만 운동을 한 날은 그래도 좀 잠도 편하게 자고, 기분도 아주 저조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 맞아요. 운동은 하기는 힘들어도, 운동한 것보다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돌려주는 유익한 일이에요. 그러니 힘들어도 마음을 다잡으셔야 해요. 그럼, 다음번에 오실 때는 말씀드린 책들, 필립파 페리의 <인생학교 정신>이나 토마스 호엔제의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 크리스토프 앙드레의 <나라서 참 다행이다> 중에 한 권만이라도 꼭 읽어오세요.
몇 주 만에 찾아온 수현 씨는 다행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인생학교 정신>과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을 읽었다고 했다. <나라서 참 다행이다>도 어제 빌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읽었다고 했다. 그는 수험생답게 작은 노트를 하나 사서 읽은 내용을 빽빽하게 적어왔다. 마음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치열하면서도 안타까운 의지가 느껴졌다.
- 읽으셨다니 참 반가운 일이네요. 그래요. <인생학교 정신>과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 중에서 어떤 책이 좀 더 공감이 가던가요?
“저에게는 두 권 모두 좋았어요. 하지만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이 조금 더 나았어요. 제 자신에게 가졌던 생각들 중에서 잘못된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정말 많이 느꼈어요.”
-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요?
“이 책에서 자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저는 저를 그동안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것이 더 자신을 주눅 들게 만들고 매사에 의욕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 했던 큰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 네, 잘 지적하셨어요. 수혐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결국 강한 의지력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자책이나 후회가 아니라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할 거예요.
수현 씨에게는 여러 권의 치유서, 철학책을 읽어올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그와의 마지막 상담 시간이 되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니 너무 고맙다고 했다. 수현 씨는 당분간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 가게를 도우며 재충전하고 다시 공무원 시험을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20대 청년들에게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를 많이 권한다. 르누아르는 청년들에게 경험에 비추어 청춘의 불안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며 이렇게 다독인다.
- 박민근, <살아갈 희망이 살아갈 희망이다> https://c11.kr/az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