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에 때리는 직장은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눈치로 그에 상당하거나 그보다 더한 인간적 모멸감을 줍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모멸감을 견디면서까지 직장을 다닐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때, 우리는 세 가지 선택지를 떠올립니다.
자살과 떠남, 혹은 직장에서 버티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속 인물처럼 훌쩍 떠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직장에서 잘 버티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습니다. 열심히로 시작하는 한국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대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 노후를 잘 보내고 싶어 합니다. 이중에는 실적이 좋은 사람도 있고 안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둘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실적이 좋은 사람을 더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나의 자존감과 일의 성과를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자존감을 회복할 것인가.
우선, 자기 삶의 주관적 만족도를 높여야 합니다. 주관적 만족도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많이 소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월급은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적고, 그래서 직무 스트레스를 상쇄시킬 만큼 소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제외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감사는 의식할수록 쉬워집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직장에 감사하기 어렵다면, 지금 이 순간이 꽤 괜찮은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삶의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따라서 지금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면, 자신이 무엇을 할 때 만족도가 높아지는지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성향에 맞추어 만족스러운 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직장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없어지거나 내가 나갈 수는 없으니, 그럴 때는 전문 용어로 포기, 학문 용어로 수용 Acceptance 해야 합니다.
수용은 포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포기는 약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용과 포기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포기는 몸부림을 치는 데도 어쩔 수 없을 때 내리는 결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상하고 자신감과 자존감도 떨어집니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인생은 살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풀리기 마련이야.” 다카시가 지하철에서 준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후의 다른 삶은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하면서 생기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향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섬기고 살핀다고 하면 보통 휴양지에서 마사지를 받는 걸 떠올립니다. 하지만 고비용이 아니더라도 오늘처럼 우선 나를 섬기는 시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 투자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만큼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혼자 마음을 다스리는 취미 생활을 해보는 겁니다.
주변 요소에 대한 수용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입니다. ‘내가 공부를 더 잘했더라면’, ‘내가 그때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가정은 소용없습니다. 다시 살아도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떡하겠습니까. 내 인생이 지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스스로를 살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초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달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직장인 스트레스 마음처방전
채정호, <퇴근 후 심리 카페> https://c11.kr/c1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