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베이스캠프, 제주

Epilogue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어느덧 제주에서 열 번째 봄을 앞두고 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오래 제주에 살고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이제 죽을 때까지 제주에 사시겠네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요"라고 답했다. 내가 우연히 제주에 살게 됐듯이, 또 언제든 바람처럼 갑자기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공기 좋고 자연이 아름다운 제주에 살면 아무런 걱정 없이 느리게 사는 줄 알지만, 이곳도 엄연한 생활의 현장이다. 화나는 일도 있고, 짜증나는 일도 있고, 기분 좋은 일도 있고, 웃기는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고, 소름끼치는 일도 있는.


나 역시 제주 생활 7년 차에 접어들 무렵, 예기치 못한 공황장애를 마주하며 일상이 무너졌던 적이 있다. 7년간 나를 행복하게 해주던 제주조차, 공황장애 앞에서는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되어버렸다. 일그러진 나의 일상을 다시 찾기 위해 나는 갑작스런 '떠남'을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과거의 떠남이 돌아올 곳 없는 방랑이었다면, 지금의 떠남은 다시 돌아올 곳이 있는 떠남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안정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것 같다. 떠나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배웠다.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세 장소를 점으로 연결하며 나만의 삼각형을 완성해가기로 했다.


발리는 치유(Healing)를 준다. 제주라는 일상에서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발리의 초록 속에 젖어들면, 그곳은 텅 비어버린 내 영혼에 다시 살아갈 힘을 충전해 준다. 발리의 자연과 발리 사람들의 뜨거운 생명력 덕분에 나는 다시 제주로 돌아와 일상을 살아낼 동력을 얻는다.


홋카이도는 중간 지점(Middle Ground)이 되어준다. 치유의 에너지만으로 삶의 무게 중심을 잡기 어려울 때가 있다. 끝없이 펼쳐진 홋카이도의 연둣빛 보리밭과 일본만의 정제된 고요함은, 발리의 뜨거움과 제주의 치열함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그 중간 지점에서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제주는 일상(Base)을 지탱한다. 발리에서 치유받고, 홋카이도에서 균형을 찾은 뒤, 나는 다시 제주로 돌아와 일상을 산다. 아침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고, 귤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그 평범하고 특별한 하루를 살아간다. 이 세 곳을 오가며, 나는 제주를 '나의 베이스캠프'라 부르기로 했다.


베이스캠프는 단순히 머무는 집이 아니다.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장비를 점검하고 숨을 고르는 곳, 그리고 언제든 돌아와 다음 여정을 계획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거점이다. 10년 전, 우연히 닿은 제주는 이제 나에게 정착지가 아닌,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나만의 베이스캠프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제주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다음 여정을 꿈꾼다.

떠나야 할 이유가 분명하기에, 나는 이곳에서 더욱 충실히 나의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떠나기 위해 머문다는 이 역설이, 어쩌면 내가 제주를 '나의 베이스캠프'라 부르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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