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추워진 1월 어느날, 귤을 따러 갔다. 가끔 동네 삼춘네 귤밭에 귤을 따러 가면 오늘 오전 간식은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게 된다. 삼춘들이 만들어준 제주 음식은 식당에서도 돈주고 사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이 많기 때문이다. 유난히 손끝이 시럽고 추운날. 그렇게 한시간 정도 귤을 땄을 무렵 "나옵써!"라는 소리가 들린다. 오전 간식 먹으러 나오라는 소리다.
귤가위를 놓고, 장갑을 벗고, 귤창고로 간다. 창고문을 열자마자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색 커다란 냄비가 보였다. 오늘 간식은 뭘까? 두둥!
오늘 오전 간식은 무가득, 멸치 가득 넣은 국물이 뽀얀 어묵탕이다.
뚜껑을 열자 냄비안에는 두툼하게 썬 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묵보다 무가 더 많아 보일 정도다. 한 조각 건져 입에 넣는 순간, 무가 이렇게 달았나 싶었다. 국물을 머금은 무는 부드러웠고, 씹을수록 단맛이 번졌다. 어묵의 감칠맛보다 무의 단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추운 겨울 아침이면 제주 삼춘들은 자신들의 우영팟(텃밭)에서 기른 무를 하나 뽑아와 달큰한 무맛이 가득한 어묵탕을 끓여주곤 한다. 어묵탕이 어묵탕이지, 뭐 그리 특별할 것 까지 있겠냐 물을수도 있겠지만 제주무로 만든 어묵탕은 그 맛이 정말 다르다. 특히 하얀 눈을 제대로 한번 맞은 무는 달달함이 최고조에 달했다고나 할까.
제주에 살기 전까지 나는 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육지에서 내가 맛본 무는 그저 깍두기의 재료거나, 치킨무 정도였다. 그런데 제주에서 처음 겨울 무를 먹었을 때, 이건 내가 알던 그 무가 아니었다. 육지의 무가 아삭하고 시원하다면, 제주무는 달고 부드러웠다. 생으로 먹어도 단맛이 났고, 익히면 그 단맛은 더욱 더 깊어졌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너무 흔한 식재료라서 제주 사람들은 제주 무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제주 무는 정말 맛있는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육지 무는 맛이 다르냐고 묻는다. "그럼요, 완전 달라요!" 실제 제주무는 겨울철 제주의 대표 작물이다. 화산토에서 자란 무는 수분을 머금고 당도가 높아진다. 추운 겨울, 땅속에서 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단맛으로 축적하는듯 하다.
겨울 제주 음식에서 무는 빠질수 없는 흔하면서도 특별한 식재료다. 제주 콩국에 옥돔지리에 고등어조림에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제철 재료다. 그렇게 자란 무는 제주의 수많은 겨울 식탁에 올라와, 국물이 되고, 반찬이 된다. 삼춘들은 이제 곧 무를 썰어 햇볕에 말려 무말랭이도 만들것이다.
얼마 전, 같이 일하는 선과장의 언니가 제주무 한 박스를 가져다 먹으라며 주었다. 제주 월동무라고 적힌 상자를 열자 흰 무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한 개 꺼내보니 꽤 묵직했다. 갑자기 많아진 이 무를 어떻게 하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 간식을 사러 갔는데 내가 산 간식보다 샘플을 더 많이 챙겨주시는게 아닌가. 한두번도 아니고 매번 올때마다 너무 많이 챙겨주시는거다. 잘됐다, 난 얼른 집에 가서 큰 무 3개를 골라 강아지 간식 가게에 가져다 주었다. "얼마전에 받은 제주무예요. 정말 달아요."
그리고 집에 돌아왔더니 옆집 여자삼춘이 귤밭에서 레드향을 따고 계셨다. 나를 부르더니 레드향 몇알을 손에 쥐어주시는 게 아닌가. "삼춘! 집에 무 있어요?" "아니, 없는데 왜?" 난 삼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하고 얼른 집에 가서 무 몇개를 챙겨와 삼춘 귤바구니에 넣어드렸다. 삼춘은 그렇지 않아도 무가 다 떨어져서 필요했던 참이라고 하신다.
너무 많아 고민이었던 무는 누군가의 밥상으로 이어져 여러 집의 겨울 식탁을 채웠다. 역시 음식은 나눠야 맛이 배가 된다.
제주의 겨울 귤밭에서 먹었던 따뜻하고 달큰한 어묵탕의 무를 시작으로, 나의 이번 제주 겨울은 이렇게 무의 단맛으로 기억될 것 같다. 제주에서 아홉번의 겨울을 보내는 지금, 이제야 진짜 '무'맛을 알아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유독 제주의 겨울이 깊어질수록, 무는 더 달아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무를 가득 넣은 어묵탕을 끓이며 달큰한 무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