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 대신 냄비밥

우리 집에는 전기 밥솥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당연히 우리집에도 남들 집에 다 있는 밥솥이 있었다. 그런데 혼자 살다 보니 밥을 해놓으면 다 먹지 못했던 밥이 며칠씩 밥솥 안에 그대로 있는 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밥은 말라가고, 결국 버리게 됐다. 처음엔 한두 번이겠지 싶었는데 이게 반복이 되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음식 남기거나 버리는 걸 엄청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보니 찜찜했다.


그래서 이후 선택한 게 햇반이었다.

햇반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필요할 때 하나씩 꺼내 먹으면 되니까. 박스로 주문해서 먹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종류별로 다 먹어본 것 같다. 현미밥, 잡곡밥, 흑미밥, 발아현미... 안 먹어본 햇반이 없을 정도였다. 한동안은 꽤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계속 먹다 보니 질리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스턴트의 미묘한 맛을 알아버렸다고 해야 할까. 어느 순간부터 햇반을 먹을 때마다 뭔가 맛의 한계 같은 게 느껴지는 거다. 아무리 편리한 햇반도 인스턴트는 인스턴트더라. 그 미묘한 맛의 차이를 알아채고 나니 햇반이 맛이 없어졌다.


그렇게 햇반을 끊고 냄비밥을 짓기 시작했다.

냄비에 밥 짓는 방법은 대충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보통 일반 냄비로 지었는데, 어느 날 문득 주방 한켠에 전시되다시피 놓여있는 스타우브 무쇠솥이 눈에 들어왔다. 산 지는 꽤 됐는데 정작 한번도 쓴 적이 없는 새 냄비였다. 내가 저걸 전시하려고 산 게 아닌데...... 내가 직접 써야지만 물건도 가치가 있는 건데. 그날부터 스타우브 냄비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은 냄비밥 짓는 게 일상이 되었다. 먼저 쌀을 불린다. 그리고 스타우브에 밥을 짓는데, 쌀이 보글보글 끓으면 전체적으로 한번 섞어주고, 아주 작은 불로 줄여서 20분 정도 뜸을 들인다. 그리고 바닥에 생긴 누룽지 또한 또 다른 한끼의 밥이 된다.


혼자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테지만 밥이 다 되면 밀폐용기에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둔다. 식사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갓 지은 밥처럼 된다. 햇반처럼 질리지도 않고 맛있게 밥을 먹고 있다.


나는 쌀밥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윤기가 좔좔 흐르는 흰 쌀밥. 요즘은 압력솥을 하나 살까 고민 중이다. 귤 따러 갔다가 밭주인 언니가 압력솥으로 지어준 밥맛이 정말 꿀맛이었다. 스타우브로 지은 밥도 충분히 맛있는데, 압력솥 밥을 먹고 나니 그 윤기와 찰기가 자꾸 생각난다. 그렇게 나는 온라인 쇼핑몰을 들락달락 거리고 있다. 요즘 겨울이라 굴과 무를 넣어 굴솥밥을 해먹는 재미가 생겨서 그것 또한 포기할수가 없다.


전기 밥솥 없이도 밥은 잘 먹고 있다. 오히려 더 건강하게 잘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번 직접 지어먹는 냄비밥이 귀찮치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맛있는 밥을 먹겠다는 마음만으로 번거로운 과정 따위는 중요치 않다. 아니 오히려 맛있는 밥 먹을 생각에 즐겁다. 그래서 냄비밥을 짓는 게 그리 번거롭지 않다. 쌀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 뜸 들이는 시간, 뚜껑을 열었을 때 올라오는 김마저도 내 눈엔 맛있어보인다.


전기 밥솥이 알아서 해주던 그 편리함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갓 지은 냄비밥이 여전히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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