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마트에 가면 과일 코너를 지나치게 된다. 늘 빠지지 않고 사오던 제철과일인데, 너무 비싼 가격표를 보고는 그냥 발길을 돌리게 된다.
참외, 수박, 포도... 계절마다 기다려지던 과일들이 이제는 금값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과일 사 먹은 지 오래됐네' 라고 인식하던 여름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툭툭 기사, '찬'.
아주 오래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여행 간 적이 있다. 매일 툭툭을 잡아 타고 다니기 귀찮아서 나는 툭툭기사를 일주일 고용했다. 캄보디아 사람인 찬은 나와 동갑이었는데, 낮에는 툭툭으로 돈을 벌고, 밤에는 야간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정말 열심히 사는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캄보디아 현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찬이 내게 '우리집에 가볼래?'라고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찬이네 집에는 노모와 함께 산다고 했다. 나는 찬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찬이네 집에 가기 전날, 나는 무엇을 사가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한국에서는 보통 남의 집에 방문할 때 과일이나 먹을 것을 사가지고 가는데 무엇이 좋을까? 그때, 내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찬이네 집에 과일을 사가려고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 하고 말이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내게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 과일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부자들이나 먹는 음식이라며, 이곳은 밥 한끼 먹는 게 힘든 곳이니 차라리 쌀이나 라면을 사가는 게 그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라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과일은 부자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 캄보디아의 보통 사람들에게 과일은 사치였다. 그 당시 한국에 사는 우리는 부자가 아니어도 늘 과일을 먹고 살고 있어서 과일이 그렇게 귀한 음식인지 몰랐다.
나는 찬이네 집에 가기 전에 쌀가게에 들리자고 했다. 마치 한국의 50년대 60년대에 봤을 법한 동네가게에서 쌀을 사고, 라면을 몇 박스 샀다. 그걸 찬이 툭툭이 뒤에 싣고서 찬이네 집에 갔다.
꼬불꼬불한 동네 모퉁이를 지나 도착한 찬이네 집. 오래되어 까매진 시멘트벽과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집, 부엌과 침실의 경계도 없는 그 공간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이게 캄보디아 현지인 찬의 일상이구나. 매일 밤 야간대학에 다니며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의 집이구나.
찬의 엄마는 나를 밝은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낯선 외국인을 경계 없이 환대하는 그 미소가 오히려 나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서둘러 쌀과 라면을 전하고 찬이네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캄보디아에서 '그곳'의 가난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데 누군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과일은 부자들만 먹는 사치의 음식이라는 것. 그건 '그곳'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과일 코너 앞을 스치듯 지나치는 나를 보며 깨닫는다. 가난은 캄보디아 '그곳'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한국에서도 충분히 과일 하나로 마음이 가난해질수 있다는 것. 사치와 일상의 경계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쯤 찬의 생활은 좀 나아졌을까? 이제 퇴근길에 과일 한 알쯤 살 수 있게 됐을까?
이번 여름 한 철, 우리집에도 과일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집은 귤과 키위가 가득이다. 이제 제주는 귤과 키위의 계절이 왔다. 주변에 귤 농사, 키위 농사 짓는 이웃들이 맛보라며 가져다 주셨다. 그렇게 또 내 마음은 금새 부자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