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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에 서서

‘평화의 착시’ 속에 서울 테헤란로에 서다

by 빵부장


한때 대중문화계를 흔들었던 화두가 있었다. 멀티버스. 같은 시공간에 서로 다른 현실이 공존한다는 상상. 영화 속 허구 같았던 이 개념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분주하다. 사람들은 커피를 들고 지나가고, 전광판은 빛난다. 그러나 같은 이름을 지닌 이란 테헤란의 서울로는 지금 공습 사이렌과 잔해 속에 있다. 서울의 일상과 테헤란의 전쟁은 같은 이름의 도로 위에서 정반대의 현실로 갈라졌다.


한국과 이란은 1962년 수교 이래 경제, 문화적 협력관계를 꾸준히 유지해 왔다. 1977년 6월, 이란 테헤란의 시장 골람레자 닉페이가 서울을 방문해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과 도로명을 맞바꾸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 삼릉로는 '테헤란로'가 되었고,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생겨났다. 이름을 건 교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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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두 나라는 반공 진영의 동맹국으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향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오일쇼크 이후 한국 건설사들이 이란으로 진출했고, 테헤란의 서울로엔 기아 프라이드가 굴러다녔다. 서울의 테헤란로는 경제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고, 두 도시는 번영의 축을 공유했다.


관계가 틀어진 출발점은 이란의 핵개발이었다. 유엔과 국제사회의 반복된 경고에도 이란은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2010년 미국은 포괄적 이란 제재법(The Comprehensive Iran Sanctions and Accountability and Divestment Act(CISADA); H.R.2194)을 시행했다. 긴장과 대립은 지속됐고, 마침내 파국은 현실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시간으로 어제, B-2 스텔스 폭격기 6대를 동원해 이란 핵시설 3곳에 최신형 벙커버스터 12발을 투하했다. 이란은 즉각 보복을 선언했고, 이란 의회는 6월 22일,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의결했다.


세계 원유의 25%가 지나는, 전 지구 경제의 혈관 같은 수송로가 폐쇄될 위기에 놓였다. 이 해협은 한국에도 치명적인 곳이다. 언론에서는 한국 전체 수입 원유의 68%를 통과하는 곳으로, 코트라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으로 오는 중동산 원유의 99%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고 분석했다.


JP모건은 호르무즈 해협이 실제로 봉쇄될 경우, 국제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까지 급등하고,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2023년 5월 이후 최고치인 5%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주부터 다시 운전을 시작했는데 유가 급등이라니 나조차 남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 바로 닿은 현실이다.


레이 달리오는 말했다. “우리는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전환점에 서 있다.” 그는 공황, 내전,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과거의 질서 붕괴를 떠올리며, 지금의 흐름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경고한다. 미국 중심의 질서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 틈에서 일어난 중동의 격변은, 바로 그 변화의 전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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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번 출구 인근에 있는 테헤란로 기념비를 찾았다. 쩌면 격동의 위기 속에서 테헤란로의 이름이 바뀐다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질서는 흔들리고 있고, 우리는 어느 편에 설지, 무엇을 지킬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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