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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Mar 04. 2022

손글씨로 기록하는 여행노트

나의 기록여정_1


시작은 그간 읽은 책 리스트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읽고 있는 책, 그리고 다 읽은 책을 어플로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다 읽은 책은 이따금 노트에 넘버링해서 기록해두고 있다. 이걸 기록하다가, 그간의 독서기록을 정리해볼까 하고 내가 써온 노트들을 찾아 뒤적거리기 시작. 그러다 다른 기록들도 같이 있어 찾아보기 시작했고, 이걸 한데 모아보니, 글쎄 이렇게 산이 되는 거다.


기록하고 또 기록하던 나의 흔적들

사실 여기 있는 것도 다가 아니고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다 찾지 못한 게 이만큼. 이 외에 학창시절 썼던 다이어리, 공부노트, 오답노트 같은 것들을 합하면 또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갑자기 임용고사 공부할 때 무지 공들여 단권화했던 나의 문학 참고서가 생각난다. 후배에게 물려줬는데 보고 돌려줄 줄 알았건만 그 이후로 깜깜 무소식. 잘 지내니 J군? 아직 안 버렸다면, 언젠가 교직에서 만나면 꼭 돌려다오 ㅎㅎㅎ)


그리고 내가 애정하며 사용했던 각종 스티커들도 총출동. 마흔이 넘은 지금도 이런 스티커들을 써가며 일기를 쓰고 있다지.


내가 써온 기록들을 정리해보니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었다. 온전한, 말 그대로 [일기]인 것들, 완독한 책 리스트와 필사노트를 포함한 [독서기록], 해마다 장만하는, 플래너를 포함한 소위 [다이어리]들, 설교 말씀이나 성경 구절을 기록해둔 [신앙노트], 그리고 오늘 소개할 [여행기록]이다.


이 중 다이어리는 스마트폰 어플로 대체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손으로 쓰는 걸 놓게 되었는데, 다시 펼쳐보니 깨알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어서 안 쓰고 있었던 기간이 좀 아쉬워지더라.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는  [일기] [독서기록]. [일기] 정말 내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죽기 전에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나 불태워버려야 하나 고민되기도 한다는.


남편과 둘이서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나던 시절, 아마 '지금이 아니면 못할  같다' 예감했던  같다. 과연 그러했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이러한 시간과 여유가 쉬이 허락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서 후배 교사들에게도 종종 권하곤 한다.   있을  많이 놀고, 마음껏 여행 다니라고(코로나 때문에 쉽지는 않은 상황이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 그게 어렵다면, 우리 동네 골목이라도 돌아볼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1  그리다 만 드로잉북

사실 이건 여행 기록이라기보다, 옛날옛적에 그림 한번 그려보겠다고 샀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린 건데, 여행에 대한 기록도 아주 조금 남겨져 있어서 펼쳐본다.


날짜를 보니 무려 2005년. 첫 번째 그림.

아마 이걸 그리고 싸이월드에 올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정말 언제적이런가. (아이를 낳고서야) 면허를 따기 전 나는 자전거를 무척 좋아했다. 자전거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여의도광장에서 친구에게 무릎 깨져가며 배웠는데, 이후 학교에서 동아리로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반>을 운영할 정도로 자전거를 좋아했었다. 대학 졸업반 때 학교 인근 하숙집에 살면서 자전거로 오가던 기억도 내게는 유난히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길을 오가며 빅마마의 '외길'을 듣다 마음이 벅차오르거나 어쩐지 슬퍼지던 순간까지도. 그때 내가 할 수 있던, 어쩌면 유일한 여행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2007년 내 생일. 결혼하고 한 달밖에 안 된 신혼이었다.


남편과의 두 번째 여행. 일본, 아키하바라.

신혼여행 후 다녀온 남편과의 첫 여행. 이때만 해도 인터넷으로 손쉽게 해결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라, 도쿄대에서 공부 중이었던 남편의 후배가 예약해준 아키하바라의 작은 비지니스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호텔 이름은 dormy inn Akihabara, 우리가 머물렀던 방이 814호였나보다. 이곳의 정갈한 아침식사가 생각이 난다. 역시, 여행은 기록으로 남겨둬야만 하는 건데 싶고.


어디서 뭘 배워서 이런 호텔 룸 평면도를 다 그려놨을까? 그림을 보니 지금도 그 방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


여행 첫날만 그리다 말아버린 여행기

이렇게 '하다 만' 것들이 내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브런치 반 년 이상 열심히 쓰고 있는 것 내겐 정말 대단한 일이다). 네이버 블로그 쓰다 말고(계정만 몇 개냐), 플래너 쓰다 말고(왜 항상 3월 즈음 지나보면 텅텅 비어버리는 거지), 운동 하다 말고(그만하자).

 


 #2  영국여행기

2009, 두 번째 영국

2008년에 영국, 프랑스 여행을 다녀온 뒤 영국과 사랑에 빠져 영국에 대한 책을 주구장창 읽었다. 결국 남편과 그 다음 해 오로지 <영국>만 다녀오는 여행을 계획했다. 굵직하게는 런던, 코츠월즈 두 곳을 기점으로 하는 여행을. (코츠월즈라니, 그렇다, 나의 취향은 참으로 할머니스러운 데가 있다)


그나저나 런던, 파리에 대한 여행기도 분명히 어딘가 있을텐데 찾지를 못했다. 다음에 찾아봐야지.


각종 ticket들

런던 지하철, 기차, 그리고 우리가 들렀던 셰익스피어 글로브에서 산 엽서도 보인다. 우와, 정말이지 그곳에서 본 공연은 충격적이었던 기억. 하늘이 뚫려 있는 공연장. 대낮에 보기 시작한 공연이 어스름함을 넘어 깜깜해질 때 즈음에야 끝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에 함께한 사람이 남편이어서 더욱 좋았던.


별 걸 다 간직하는 사람

각종 식당에서의 기록. 더 열심히 남겨두지 않은 것이 아쉽다. 런던도 런던이지만, 특히 코츠월즈 그 중에서도 바이브리는 내게는 정말 환상적이었는데. 챌튼햄에서 묵었던 B&B도 참 아름다웠다. 안방에 책장을 들여놓은 건 이 숙소 안에 있던 책장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 침대 옆에 놓인 붙박이 책장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꼭 저렇게 침실에 책장을 두어야지' 했었던 기억. 언젠가 영국 여행에 대한 기록은 따로 해보고 싶네.



 #3  스페인 여행

2010.12.24 ~ 2011.01.02. 스페인

그렇다, 그 해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행을 떠났다. 하여 공항에 리무진 타고 가다가 숨 넘어갈 뻔 했다. 차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막혀서. 비행기를 놓치는 건 아닌가 손에 땀을 쥐었었다는. 무사히 보딩을 했기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겠지만. 스페인은 크게 바르셀로나, 마드리드로 계획하고 사이사이 톨레도, 지로나 등의 소도시를 다녔다.


참으로 열심히도 여행을 다녔다. 이전에 아래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둘이서 주구장창 여행을 다녔으니 아이 갖는 것을 자꾸만 미루게 되었던 것.


https://brunch.co.kr/@howgreat99/51


본론으로 돌아와서, 과연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한 바르셀로나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재미있는 사진들도 참 많이 찍어놨는데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것이 아쉬운.


까사 바트요,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tickets.

가우디의 나라 스페인. 정갈한 런던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썩 마음이 가는 스타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의미있었던 시간.


Girona에서.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건 이곳, 지로나. 유럽의 소도시들이야 다 비슷비슷하게 닮아 있겠지만, 이때만 해도 유럽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 내겐 각별했던 곳이었다. 고즈넉한 마을의 풍경, 아담한 건물들,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구경했던 벼룩시장까지. 역사가 짙게 묻어있던 톨레도도 멋졌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런 곳에 더 마음이 간다. 저 귀여운 주머니는 그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귀걸이를 넣어준, 나름의 case. 출근할 때도 꽤 많이 끼고 다녔는데 어느새 뭔가 고장이 나 버려 고이 간직만 해두고 있다. 빈티지한 구릿빛의 링 귀걸이였다. (애기엄마가 된 이후에는 이런 액세서리 구경하고 멋을 내는 사치를 부려보지 못하고 산다 흙흙)


Toledo

톨레도에서 남긴 스냅샷들. 인스탁스까지 가지고 다니며 찍었으니 참 정성이다. 지금은 핸드폰으로나 찍어두면 다행.


톨레도를 오간 기차 티켓



 #4  오스트리아 여행일기

오스트리아 여행 노트

2011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와 잘츠부르크 여행기. 원래 이곳에서 정말 보고 싶었던 건 브레겐츠 호반에서 열리는 오페라 공연이었는데. 이유는 생각이 안 나지만 그건 보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호반 음악제 같은 것이 생기기 전이라, 이런 공연이 너무나 참신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오스트리아 빈이 아니라 인스부르크를 먼저 찾았던 건 그래서였던 것.


각종 ticket들

독일어 1도 모르면서 찾은 오스트리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다시 보았더랬지. 인스부르크에 있는 에메랄드빛 인 강inn river 옆을 자전거를 빌려 달리던 기억. 케이블카로 알프스에 다다라본 기억들. 모두 잊을 수 없는 순간들. 무엇보다, 바삭바삭한 슈니첼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이태원에 있던 '쉐프 마일리'에서 바로 그 맛을 누릴 수가 있었는데, 이제 없어져버려서 무척 슬프다.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쓴 기록


기내에서 먹은 스낵 봉지까지 붙여두었다


헤이즐넛 웨하스가 너무 맛있어서 인상적이었다지


인스부르크 동물원에서의 즐거웠던 기억


알프스를 오르게 해준 케이블카 ticket


내 생일에 남편이 몰래 써준 편지 :)

아이들과 이런 곳을 언젠가 함께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코로나 때문에도, 재정적으로도 부담이 되어 쉽지만은 않은 상상. 그렇지만 언제고, 아이들과도 먼 나라에서 함께 여행해볼 수 있는 날들을 꿈꾼다.



 #5  남편의 여행 편지

남편의 중국 출장기

직업특성상 남편은 해외, 국내 출장을 참 많이 다녔는데, 그때마다 엽서나 편지를 써주곤 했다. (그러고보니 받아본 지 꽤 오래됐다. 그치만 둘 다 직장과 육아 전선에서 분투하느라 카톡 주고받기도 바쁨)


이때는 편지지를 구할 수 없어 가지고 간 노트에 써주었다고. 아직 둘째 낳기 전이라 첫째 키우면서 출장과 야근, 회식도 잦았던 남편 기다리며 참으로 쉽지 않았던 시간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으로 돌아보니 힘든 시간만은 아니었다고 미화되는 것인가 되돌아 보게 된다.


남편의 편지 첫 페이지

결혼하기 전 교무실로도 편지를 부쳐주던 신랑. 매년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고 꽃을 보내주는 남편. 맨날 이것저것 놓치고 흘리고 헐레벌떡 하는 ENFP 아내에게 참으로 신실하고 한결같은 ISFJ 남편. 물론 서로의 다른 점으로 인해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다른 점을 마치 올록볼록 퍼즐을 맞추어가듯 서로에게 맞추고 다듬어가며 오늘을 살고 있다.




 그리하여 삶은, 여행


이러한 기록들이 없었더라면 지나온 시간들을 추억하고 헤아려보기가 좀더 막막했으리라. 나름의 여행을 해보면서, 그 소중한 순간들을 지나면서 했던 생각이 있다. 여행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돌아가서 삶의 자리도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보면 조금은 더 재미가 있으리라. 삶을, 여행처럼. 여행에서 때로 비바람도 만나고, 지하철은 파업 중이고, 낯선 언어에서 때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어도 결국에는 어떤 길로든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새롭고 즐거운 여행의 나날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삶도, 여행처럼. 때로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더라도 내일은 따뜻한 햇살이 비칠 거라 기대하면서. 매일의 삶을 나만의 언어로 기록해나가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내 삶도 조금쯤은 다채로워질지도 모른다고.



하여, 당신에게도 기록을 권합니다.

여행의 기록들을,

그리고 삶이라는 여행의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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