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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우 Apr 14. 2023

<소울>의 22번 같은 존재들

STILL LIFE



당신을 삶을 사랑하는가, 하고 누군가 물었다면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을 것이다. 당장 어제도 일거리를 잔뜩 들고 퇴근 아닌 퇴근을 하는 길에 그 생각을 했다. ‘아, 언제까지 이렇게 살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 근데 프롬은 책 제목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라고 했다. <Do We Still Love Life>
아니 still 이라고? 스틸?
언제 삶을 사랑했었는지 기억도 잘 안나는 것 같은데 여.전.히.라니.


프롬은 ’인간은 본래 삶을 사랑한다‘ 를 전제로 이야기한다. 인간은 사랑하도록 태어났는데, 사랑하지 않으려 한다고. 여러 원인에 의해 사랑하지 않게 되버린다고.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는 것을 그만두자고. 사랑하려 해보자고. 사랑하자고.



언젠가, 어디선가 “삶, 사람, 사랑” 이라는 낱말들이 서로 닮아있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프롬의 말대로 어쩌면 ’사람은 삶을 사랑한다‘는 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삶을 사랑한 적이 있었나? 삶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느낌이니까, 질문을 바꾸어 내 생애 어느 순간을 사랑한 적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있다. 좀 더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꽤 있는 것도 같다.

당장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내가 삶을 사랑한 순간은,



작년에 가르쳤던 아이들을 급식실에서 우연히 만난 순간이다. 식판에다 밥을 담으려고 쪼로록 서 있던 작년 아이들과 밥 먹는 시간대가 우연히 맞았다. 1월에 보고 오랜만에 봤으니 마지막으로 보고 2개월쯤 지났다.

아니 그런데 보자마자 요것들이 아주 세상 반갑게 환히 웃으며 선생니이이이임!!!!!!!! 하며 인사를 한다. 그 왁자지껄한 소리를 듣고 앞쪽에서 줄 서 있던 아이들이 빼꼼빼꼼 고개를 내민다. mbti로 치면 대문자 E에 가까운 아이들은 벌써 굳이 큰 목소리로 멀리서 다 들리게 주변 친구들에게 “작년 우리반 선생님이야!” 소개하고 있다. 식사를 하는데 굳이 테이블을 돌아 돌아 내 쪽까지 와서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간다. 으이구,

3년만에 드디어 불투명한 칸막이가 없어진 급식실에서 이제 멀리서도 서로가 보인다. 밥을 먹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멀찍이 I에 가까운 아이들은 나를 ‘보며’ 말없이 먹고 있다. 프롬이 말한 진정한 ‘본다’의 의미로 보고 있는 느낌이다. 눈이 마주쳐서 웃으며 손을 흔드니까, 여전히 쑥쓰러운듯 하면서도 미소짓고선 꾸벅 꾸벅 인사들을 한다. 웃기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말 찰나였지만. 오늘 그 때의 나는 삶을 사랑했던 것 같다. 아니다, ‘같다’ 라고 표현하기엔 아이들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니 수정한다.


오늘 그 때의 나는 나의 삶을 사랑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어 온 문장들은 매우 많았지만 오늘에 어울리는 문장은 이것이었다.

“누군가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가 관심을 품기 때문이며, 누군가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사랑할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깃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창의적이고 매우 감탄을 잘하며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아이들 덕분에, 잠시나마 나 또한 나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손에 꼽히게 정말 좋아하는 영화들도 사실 그런 영화들이다. <소울>이나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와 같은 영화들. 아, 그러고보니 이렇게 잠깐 잠깐이 아니라 나도 보다 자주, 많이, 늘,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싶네.



문득 마치 영화같았던 내 인생의 순간 순간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떤 순간은 로맨스였고, 또 어떤 순간들은 시트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내가 이쪽 영화를 끝내고싶은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과 수업’ 그 외적인 일들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들은 재난을 극복해가는 전쟁영화같고 매일이 액션영화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지나고보면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아직까지는 운이 좋게도 <소울>의 22번 같은 존재들을 자주 만나며 산다.


아니, 내가 뭐라고. 무얼 그리 반갑게 인사를 하나. 속도 많이 썩여놓고선. 아이쿠 귀여운 것들, 고새 또 많이 자라왔네. 여전히 그대로네. 하고. ㅡ 어쩌다 감동적인 휴먼드라마 속 한 장면에 슬쩍 들어가 좋은 어른인 척 사람 좋게 반갑게 손 흔들다 나도 같이 진정으로 슬쩍 웃게 되는 그런 순간들.


그래,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다큐멘터리가 또 어느 순간에 장르 변경할지 모르니까,
아직까지는 살아있으니까.
still life.



그러니까 아주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사실은 나라는 인간도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글 이호우 2023.3.9

표지 애니메이션 <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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