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가 없는 독후감
수험 생활 2년 만에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A는 정식 임용을 앞두고 수습발령을 받아 근무 중이었다. 학교의 규모와 전체 학급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원으로 운영 중인 행정실이었기에 민폐가 되지 않도록 얼른 일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던 A는 출근 첫날 행정실장으로부터 남자 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들었다. 부모님은 뭐하시냐, 형제는 어떻게 되냐는 호구조사까지 면밀히 마친 실장은 A가 아닌 계장을 향해 들었지? 알아서 잘 해봐!라고 했다. 계장이라는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에 A 역시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는 얼굴로 웃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A와 계장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길 바랄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몹시 고된 연애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A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라곤 방금 물어뜯은 손톱만큼도 없었을뿐더러 그런 마음을 상쇄할 만큼 계장에게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실장과 계약직 공무원을 비롯하여 행정실을 드나드는 온갖 교직원들에게 A의 마음이라거나 생각, 상태 따위는 중요치 않은 것이라 매일같이 계장과 만남을, 깊은 관계를 맺어볼 것을 종용하였고, 심지어 교장까지 나서서 너희가 잘 되면 내가 주례를 서겠다며 스물다섯이면 빠른 나이도 아니니 잘 생각해 볼 것을 강권했다. 그때마다 A와 계장 모두 웃어넘겼고 그렇게 계속 넘기면 될 줄 알았던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두 사람은 교감의 손에 이끌려 한 사람의 엉덩이도 감당하기 어려울 좁은 의자에 꼭 붙어 앉게 되었다. 이쯤에서 드디어 사랑이 싹트는 건가, 싶겠지만 한숨을 깊게 내쉰 계장이 A에게 꺼낸 말은 그래서 사회생활 하긴 하겠어요? 였다. 아. 드디어 상사로부터 사회생활에 대해 배우는 건가!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운 A에게 계장은 어른들이 말씀하시면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길 줄 알아야지 무슨 표정이 그러냐, 나는 뭐 A 씨 좋은 줄 아느냐 했다. 거울을 보며 웃어넘기는 표정을 반복해서 연습한 후 출근한 다음날부터 계장은 A에게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A가 회계프로그램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거 지금 알아서 뭐하게요, 직접 예산 짜시게? 했고 민망해서 책을 가져와 펼치면 그럴 시간도 있고 참 좋겠어요? 라며 물음표가 붙었지만 질문은 아닌 말을 늘어놨다. 어떤 과정을 통했는지 알 순 없지만 계장은 임용 동기 가운데 A의 고등학교 동창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A에게 그 사실을 계속 주지시키며 학교 다닐 때도 이랬는지 물어봐야겠네, 한 것에 그치지 않고 A의 연수 동기들, 정작 A는 말 한마디 섞은 적 없는 사람들, 까지 알아내 그들과 메신저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A에게 알렸다. A가 계장에게 물은 것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A로서는 궁금하지도 않은 걸 자꾸 말해주는 계장에게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 거울을 보고 연습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한 세기 같았던 한 달이 흘러 수습기간이 끝난 지 2주 만에 A는 돌연 임용 포기각서를 제출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연수와 수습 기간엔 배운 것이 없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고, 나이도 세 살이나 많은 주제에 자꾸 추근덕댄다는 이유로 옆 학교 실장을 싫어하는 계장이 열 살이나 많은 사람과의 연애를 상상하기 어려워 자연스럽게 웃어넘기지 못하는 A를 탓하는 이유를, 그런 계장이 말하는 사회생활의 의미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준비했던 기간이 떠올라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여행 차 찾은 해운대 밤바다에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어떡-해, 어떡-해애-' 하는 걸 듣고는 확신이 섰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