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병원 가기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은 엉망진창이다
병원 한 번 가면 수백 불은 깨진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한창 자주 아픈 시기(세 돌 이전)는 지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항생제를 포함한 각종 약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남편 회사를 통해 가입한 보험에 적지 않은 돈을 냈지만, 정착하고 1년 반 정도는 특별히 병원 갈 일이 없었다. 건너 건너 소개받은 한인타운 내 소아과로 아이들 기관에 제출할 서류* 떼러, 독감 접종 맞으러 간 정도라, 소아과 주치의? 굳이? 생각했다. 참으로 나이브(naive)했다.
*미국은 프리스쿨, 초등학교 등 기관에 입학할 때, 전담 소아과 전문의가 작성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예방접종 기록을 포함한 영유아 검진 결과지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러다 지난해 3월, 다민이의 프리스쿨에서 작지 않은 사고가 있었다. 다민이의 눈썹 윗부분이 찢어져 ‘아이의 얼굴에 찢어진 부위를 꿰맬 수 있는’ 성형외과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인타운 소아과에 전화해 성형외과 레퍼럴을 요청한 남편은 황당한 답변을 받게 된다:
직접 한인타운 성형외과 몇 군데 전화를 돌리면서 수술 가능 여부를 확인해 보셔야 해요.
결국 프리스쿨 친구 엄마를 통해 소개받은 성형외과 닥터에게 수술은 잘 받을 수 있었지만, ‘때가 왔다’고 느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소아과 주치의를 찾을 때.
검색 끝에 UCLA Health(미국을 대표하는 대형 대학병원 시스템)의 가까운 지점에 근무 중인 Dr. Jeon(이후 ‘전 선생님’) 을 찾았다. 리뷰도 좋고 신규 환자도 받는데 심지어 한국어가 가능한, 그야말로 삼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분이라 바로 진료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전 선생님과의 첫 진료에서 나는 미국 의료 시스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아무리 첫 진료라지만 두 아이 합쳐서 한 시간 이상을 여기저기 살펴보고 다양한 질문을 하면서 어찌나 친절하고 꼼꼼하게 봐주시는지, 한국 병원의 5분 진료에 길들여져 있던 나로서는 황송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한국 소아과에서 종종 느꼈던 괜히 위축되고 야단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의사 선생님의 태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통통하던 다민이의 체중이 상위 90 퍼센타일 이상이 나온 결과를 보면서 내게 생활패턴과 식사량, 식단 등을 물을 때도 “아무 문제도 없는데 확인 차 여쭤보는 거예요”, “어머님이 너무 잘하고 계시네요.” 나를 칭찬하고 안심시켰다.
과거 주원이가 18개월 영유아검진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는데 ‘언어발달이 다소 늦다’는 결과를 두고 ‘아이를 좀 더 늦게 재우고 아빠랑 시간을 보내게 하라’는 처방(?)을 받았었더랬다. 그때도 우리 아이가 말이 늦은 건 절대로 인풋이 부족해서가 아니며 아이한테는 잠이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던 나는 흘려듣고 말았지만, 부족함의 원인을 부모의 양육환경에서 찾던 게 두고두고 기분 나빴던 기억이다. 어디가 아파서 왔냐는 질문에 “이래저래서 아무래도 감기인 거 같은데 어쩌고”하니 “진단은 제가 할 테니 어머님은 증상만 말씀하세요” 퉁명스럽게 말을 자르던 선생(’님’ 자도 붙이기 싫은)도 있었다.
안 그래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내가 뭘 잘못해서 애가 아픈 건가?’ 늘 불안하고 반성하고 자책하는 초보엄마에게 한국의 소아과 의사들은 대체로 위안보다는 가르침을 주는 존재였다. 그런 나에게 전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렇게까지 비싸야 하나 의아할 만큼 높은 보험료, 응급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뒤에 잡히는 진료 예약, 아이 이마 열 바늘 꿰매고 청구된 2천 불 이상의 비용 등을 겪으며 쌓인 분노와 설움을 사그라들게 하는 경험이었다.
엊그제는 남편이 병원에 다녀왔다. 역시 미국에 온 지 2년 3개월 만에 첫 병원 방문이었는데 몇 주 동안 지속된 턱 주변 근육통 때문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진료를 받고 돌아온 남편의 표정이 밝았다. 함께 영상을 보면서 턱 주변 마사지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남편의 손을 본인 턱에 대보게 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설명해 준 끝에 포인트를 찾았다는 것이다. 진료 후 이틀 정도 셀프 마사지를 열심히 한 남편은 입을 마음껏 벌릴 수 있다며 행복해한다.
한국에서 이 문제로 병원에 갔으면 어떤 처방을 받았을까? 일단 의사 선생님 턱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을 거야, 영상을 보면서 마사지를 함께 하지도 않았겠지? 근육이완제를 처방받지 않았을까?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했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함께 싱거운 상상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좋은 서비스를 받으면 그동안 쌓였던 불만과 불안이 녹아내리는 순간이 있다. UCLA Health에서의 경험이 바로 그랬다.
물론 여전히 미국 의료 시스템은 비싸고, 절차가 번거롭고, 진료를 받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보다 수평적이고,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존중해 주는 태도는 분명한 장점이다. 아이들과 함께 병원을 다니며 겪었던 일들, 그리고 남편이 직접 경험한 작은 차이들이 쌓여, 결국 ‘좋은 의료 경험’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앞으로도 병원을 찾을 일이 생기겠지만, 이제는 최소한 ‘내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주치의가 있다’는 든든함이 있다. 처음엔 보험료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했지만, 이렇게 안심하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의료비 청구서를 받을 때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