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빠에게
엊그제는 아빠의 생신이었다.
공교롭게도 엄마아빠의 생신은 같은 10월이고, 유난히 정신없는 날을 보내고 있는 나는 두 번 다 제때 편지를 쓰지 못했으며, 가뜩이나 방치되어 있는 내 브런치는 의도치 않게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장이 되고 있다.
사실 아빠에 대한 글은 지난해 아빠 생신에 이미 한 번 썼던 터라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더 고민이 됐다. 우리 아빠가 참 할 이야기가 많은 재밌고 특별한 사람이긴 하지만 자칫 식상할 우려가 있으므로.
그러다 엊저녁 아이의 색연필을 깎아주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나의 할아버지(그러니까 아빠의 아빠)는 연필을 참 잘 깎으셨더랬다. 아주 정갈하게, 연필깎이보다 예쁘게. 주로 덜덜덜덜 손잡이를 돌려쓰는 연필깎이를 쓰던 세대지만, 할아버지 댁에 가면 가끔 손주들의 연필을 깎아주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그 세대 할아버지였다. 손주들을 야단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사랑을 표현하지도 않는.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아주 어릴 때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나 애틋한 추억이 없달까.
아무튼 아이들이 잠들고 혼자 식탁에 앉아 색연필을 깎다 뜬금없는 기억을 소환하게 됐는데 그러다 문득 ‘우리 아빠는 내 아이들에게 어떤 할아버지로 기억될까?’ 싶어 졌고, 오늘은 이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아직 아이들이 5살, 2살밖에 안됐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다양한 추억을 만들어 갈 테지만)
아빠는 아마
에너지와 힘이 넘치는 젊은 할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산책을 나가면 “안아줘, 업어줘, 무등 태워줘”하는 주원이에게는 특히 더 그렇겠지? 젊은 나나 남편도 때론 힘에 부쳐 어르고 달래서 설득하는 육체노동(?)을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기꺼이 하는 할아버지! 유모차 끌고 화담숲 한 바퀴도 거뜬히 도는 할아버지! 딸 둘을 키우며 생전 해본 적 없는 ‘싸움놀이’도 다섯 살 손자와 즐겁게 하는 할아버지! 그게 바로 우리 아빠다.
이보다 더 크게, 그리고 중요하게는 뭐든지 오케이 하는 허용적인 할아버지로 기억되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아빠는 자식들한테도 딱히 ‘하지 마, 안돼’ 한 건 없었는데 사실 그건 이미 엄마가 알아서 자식들을 잘 managing(사랑으로 키운 건 기본값!) 하기도 했고, 나와 내 동생은 대체로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범생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심. 그런데 내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아빠를 다시 한번 보게 됐고, 새삼 놀라고 반했다(으응?ㅋㅋ). 내 머릿속에 있는 이론, 즉 위험하거나 남을 다치게 하는 거 말고는 허용해라를 저렇게 잘 실천할 수 있다니! (저런 아빠를 두었음에도 난 대체 왜 이렇게 틀에 박힌 컨트롤 프릭으로 성장한 것인가? 역시 타고나는 게 큰가?)
손주들이 생기면서 엄마아빠의 생신은 늘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이번 아빠 생신은 우리 집의 세 번째 아기 천사, 나의 첫 조카, 베이비 태리의 백일잔치와 합동으로 진행되면서 더욱 정신이 없었다. 나름 와인도 마시고, 생일 초도 불었지만, 제대로 아빠와 눈을 맞추고 마음을 전할 시간조차 없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아빠를 많이 닮은(심각한 길치에 물건도 잘 흘리고 기억력도 나쁘고 골치 아픈 행정 업무를 질색팔색 하는 그런 점들?ㅋㅋ) 큰 딸이 아빠의 딸이라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지와 늘 고맙고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늦었지만 다시 한번 생신 축하해요, 나의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