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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용 Apr 25. 2024

설거지

무기력한 몸을 이끌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변함없는 나날 속 그날은 유달리 방치된 그릇들 사이로 향연 하는 악취가 너무 거슬렸다. 나는 고작 집안일에 피곤함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 싫음에도 불구하고 악취를 제거하고자 싱크대 앞으로 다가서는데, 마치 그것을 눈치챈 듯이 악취는 더 악랄하게 풍겼다.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하다 참사로 번질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냥 눈 딱 감고 떨어뜨려서 형체와 함께 냄새를 지울 것인가 아니면 물을 받아 수세미로 깨끗하게 세척을 할 것인가. 둘 다 해결하려는 행위인 건 똑같다. 하지만 전자는 금방 해결할 수 있지만, 파편과 함께 새로운 수고스러움이 생겨 귀찮아진다. 후자는 완벽히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상황이 생기지 않으니 전자보다는 덜 귀찮아진다.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수챗구멍을 막으며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기 전 또 생각에 빠졌다. 따뜻한 물과 찬물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똑같은 물이고 어차피 세제가 다 냄새를 뺄 테니 그나마 손이 덜 시린 게 좋을 것 같아 따뜻한 물을 선택했다. '따뜻하다.' 뽀드득 소리와 함께 불순물이 씻겨 갔다. ‘부럽다.’ 불순물에 감춰졌던 광채가 훤히 드러났다. ‘부럽다.’ 거슬리던 악취마저 손쉽게 사라졌다. '부럽다.'

'나도 깨끗하게 지워지면 어떨까. 흔적도 없이.'     


세척을 끝낸 후 수도꼭지를 잠근 채 식기 건조대에 그릇을 하나둘씩 올렸다. 그런데 분명 수도꼭지는 잠갔는데 그릇에 물기는 지 않았다.


사진출처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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