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씨름 (4-27, 29-31장)
지난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친구들은 욥에게 가시돋친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지요.
“회개해라.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애써라. 잘 모르겠으면 일단 잘못했다고 말해라. 그러면 뭔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친구들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소발의 충고를 다시 보겠습니다.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11:13-19)
액면 그대로 읽는다면 아름다운 약속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욥은 그 제안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금 욥에게 있어 무턱대고 회개하는 것은 –설령 그로인해 상황들이 전부 회복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욥은 목숨을 걸고라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야 말겠다는 기세입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욥기 13장 15절을 여러 번역을 통해 읽어봅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개역개정)
비록 그분이 날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믿고 내 주장을 굽히지 않을 걸세.
(쉬운성경)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온 발자취를 그의 앞에 낱낱이 밝히리라.
(공동번역)
욥은 어째서 이토록 하나님과의 대면과 변론에 집착할까요? 그 이유는 욥의 신앙에 있습니다. 욥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 없었습니다. 욥의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가 넘치시며 공의로 가득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신뢰가 욥의 삶을 지탱해 왔습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만은 잃을 수 없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욥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욥은 회의에 부딪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은 것일까?" 라는 질문 말이지요. 3강에서 우리는 C.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책의 구절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었지요?
내가 무서워하는 결론은 "그러니 하나님이란 결국 없는 거야"가 아니라,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인 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인 것이다. 주1)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셨나요? 신앙을 갖게 된 후, 삶의 모든 일이 성경의 원칙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의 눈길을 거둔다는 생각이 들 때 ....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종종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회의'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회의라는 과정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불신앙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불안함이 찾아오고, 그럼에도 '그렇다고 이 상황을 나보고 받아들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믿은건 뭐란 말인가?'라는 의구심도 함께 올라옵니다. 어떤 이는 회의하는 과정에서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믿음이 흔들린다는 점에서 회의를 무조건적으로 장려할 수만은 없지만, 회의는 분명 긍정적 측면이 있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다음와 같이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성령의 열매와 정반대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주2)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을 통과할 때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단단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회의 자체는 위험하게 보이지만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실족하는 사례를 두려워한 나머지 교회나 공동체에서 회의적인 질문들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 경우 사람들 속에는 오히려 왜곡된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회의 자체는 신앙의 위기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마귀의 시험으로 단정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목회자와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이 과정을 건강하게 통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 이러한 회의의 과정은 쉽지가 않습니다. 욥에게는 확고한 진리의 성경도 없고, 그를 도와줄 목회자도 없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신학으로 그를 더 힘들게 하는 친구들만 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욥에게 가장 답답한 장벽이 있는데 그것은 회의의 대상인 '하나님'입니다. 지금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사람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소중히 여기십니까?
아침마다 살피시고, 순간마다 시험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침 삼킬 틈도 주지 않으십니까?
사람을 감시하시는 주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나를 표적으로 삼으십니까? 내가 당신께 무슨 짐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7:17-20, 쉬운성경)
왜 당신은 저를 피하시고 원수 취급하십니까?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같은 저를 왜 괴롭히십니까? 마른 풀과 같은 저를 왜 쫓아오시나요?
당신은 저의 죄를 모두 기록하시고, 어렸을 때의 잘못을 갚으십니다.
당신께서 제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걸음마다 지켜 보시고 내 발자국까지 추적하시니,
내가 썩는 물건처럼 썩어져 가고, 좀먹은 옷처럼 생명이 약해져 갑니다
(13:24-28, 쉬운성경)
하나님께서 나를 공격하시고, 내 살을 찢으시며 이를 갈며 노여움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시네.
사람들도 입을 벌려 조롱하고 내 뺨을 치며, 모두 하나같이 달려들어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악당들에게 넘기시고,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그분이 평안히 살던 나를 박살내시고, 멱살을 잡아 혼내시며, 표적으로 세우셨구나.
그분의 화살들이 사방을 두르고, 인정사정없이 내 심장을 쪼개니, 내 쓸개가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
그분이 나를 계속해서 치시고, 내게 용사처럼 달려드시는구나.
(16:9-14, 쉬운성경)
그분이 내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며, 내 길을 어둠으로 가리셨구나.
나에게서 영광을 가져가시고, 내 머리의 면류관을 벗기셨구나.
그가 사방에서 나를 치시니 내가 죽게 되었고 나무를 뽑듯 내 희망을 뽑아 버리시는구나.
내게 화를 내시고, 나를 마치 원수 대하듯 하시며,
그의 군대를 내게 보내시니 그들이 내 집 주변을 둘러쌌구나.
(19:8-12, 쉬운성경)
말씀을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욥이 느끼는 하나님은 지금 자신을 대적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욥은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며 맹렬히 공격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 앞에서는 반항조차 쉽지 않습니다. 대화를 시도하려고 해도 대화의 상대인 하나님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지요. 공포가 욥의 입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그분의 적대감 앞에 벌벌떨고 있습니다.
욥이 느끼는 또 하나의 하나님 모습이 있습니다.
내가 '폭력이야!' 하고 외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고,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지만, 그 곳에 정의는 없구나.
(19:7, 쉬운성경)
내가 동쪽으로 가도 그분은 아니 계시고, 서쪽을 돌아보아도 찾을 수 없구나.
그가 북쪽에서 일하실 텐데도, 뵐 수가 없고 그가 남쪽으로 돌이키시나, 그를 뵐 수 없구나.
(23:8-9, 쉬운성경)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으나 응답하지 않으시고, 주 앞에 섰으나 주께선 바라보기만 하십니다.
(30:20, 쉬운성경)
욥이 느끼는 하나님은, 그로부터 얼굴을 돌려버리시는 분입니다. 욥이 무어라 외치고 울건 그분은 상관도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간신히 힘을 쥐어짜 소리를 내어도 그 앞에는 절망적인 벽이 서 있을 뿐입니다. 이정도 되면 분명 그분이 느껴질만 한데 오히려 차디찬 침묵만이 이어질 뿐입니다. 지금 욥은 아무리 주위를 찾아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이 상황에서 철저히 입을 다물고 계십니다. 욥의 어려움이 상상되시나요? 이쯤되면 그가 삶을 스스로 포기한다 해도 무어라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절망하면서도, 자신을 공포로 몰아붙이는 폭력적인 하나님을 향해 오히려 소송을 제기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5-26)
본문은 헨델의 메시야 등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하는 여러 예술 작품에 인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신약의 그리스도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고통당하고 있는 욥이 부지중에 메시야의 고백을 예언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처절한 고백을 토해내는 욥에게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욥은 설령 내가 이 고통에 지쳐 숨이 끊어져버린다 할지라도 육체를 벗어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야 말겠다고 결심합니다. 마치 소설 속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이 "날 죽여봐라. 귀신이 되어서라도 널 따라다닐테다" 라고 말하는 뉘앙스와 비슷한 것이지요. 욥이 살던 고대에 부활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이 보여주고 있는 의지는 놀랍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23:10)
본문 역시‘연단’과 ‘훈련’의 관점에서 현대 성도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토대로 한 찬양도 많지요? 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이 절을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해서 더욱 순결하게 만들어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고난이 연단의 목적이 아닐뿐더러(우리는 그것을 앞에서 확인했습니다), 욥 역시 자신의 무죄함을 한창 주장하던 와중에 이 말씀을 뱉어냈기 때문입니다. 주3) 공동번역 구절을 살펴볼까요?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공동번역)
결국 가장 유효한 해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다 알고 계시다. 그가 나를, 검사가 죄인을 탈탈 털 듯이 털어도 결국 나는 정금과 같이 깨끗하고 무죄하게 밝혀질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또 하나의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1:35-37)
본문은 욥의 최후변론 중에서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욥은 마치 법정에 선 것처럼 자신의 최후변론에 서명하여 그것을 제출하기를 원하며 하나님께 이와 같이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소하셨다면 그 고소장을 다오. 나는 자신있다. 나는 그것을 어깨와 머리에 달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겠다. 나는 당당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욥은, 사납고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담한 시적 표현들을 사용하며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집스러움을 넘어 신성모독의 경계선까지 오가는 욥이지만, 욥 역시 자신이 하나님처럼 완전무결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논쟁에서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로운 삶을 비추어 보았을 때 현재의 고난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렇게 회의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는 육신이 쇠락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일단 잘못했다고 말해라"는 권면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질문들 앞에서 너무 쉽게 순응해버리지 않나요? 물론 이해되지 않는 어떤 상황은 하나님께서 나의 숨은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을 (나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데도)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면 신앙 자체가 왜곡될 수 있고, 영혼의 어둠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이신애(전도연)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 살해당합니다. 이후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고 평안과 기쁨을 찾는 듯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충격과 슬픔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으로 마음 속의 문제들이 다 끝났다고 억지 정리를 해버린 것입니다.
착각 속에 살던 그녀는 살인범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면회를 신청합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뻔뻔한 태도의 살인범을 만난 신애는 쇼크를 받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교회를 저주하는 캐릭터로 돌변해 버리지요.
이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됩니다. 힘겹고 어렵더라도 납득이 되지 않는 현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씨름해야 합니다. 시편에서 자신의 처지를 울분으로 토해내는 다윗처럼, 조국이 왜 멸망했는지 알면서도 하나님께 “어찌하여!”라는 질문들을 쏟아냈던 선지자들처럼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평생에 걸쳐 속시원한 정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그 질문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질문과 씨름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후에 다루겠지만 그것은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으시는 행위입니다.
주
1) C.S.Lewis, 「헤아려 본 슬픔」(홍성사), p.23
2)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디모데) "26 day 시험을 통해 성장하기" 中
3)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