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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04. 2020

5강 회의하는 신앙은 위험한가 (1)

욥의 입장 (4-27, 29-31장)

 보스니아 헤르체코비아 출신의 바히드 할릴호지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축구 감독입니다. 다름아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알제리 대표팀을 맡아 대한민국을 4-2로 대파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지요. 이 대회를 통해 알제리는 사상 첫 월드컵 16강의 쾌거를 이루었고 토너먼트전에서 우승국 독일을 연장까지 몰아붙이는 놀라운 경기력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


 한국과의 악연은 이후에도 이어지게 되는데, 그가 다름아닌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제리 대표팀 때도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축구협회와 갈등을 일으켰던 그는, 일본 대표팀에 와서도 일본 축구협회와 끊임없는 불협화음으로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결국 그는 일본을 최종예선 조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당합니다.


 문제는 그 시점이 러시아 월드컵을 2개월 앞둔 때였다는 것인데요, 경기력 저하로 비판받던 시기에도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믿고 가겠다’던 일본축구협회가 메이저 대회를 코앞에 두고 감독을 경질시킨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할릴호지치는 격노했고 일본 축구협회의 진정성있는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축구협회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할릴호지치는 법정 소송을 제기했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이 때 그가 요구한 배상 위자료가 단돈 ‘1엔’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구인들 사이에 유명한 ‘할릴호지치의 1엔 소송’입니다. 그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 축구협회가 왜 자신을 경질했는지 진짜 이유를 설명해주기 원했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주기 원했습니다.


 할릴호지치에게 있어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처럼 욥에게도 ‘하나님께서 거둬가신 부와 명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다시 회복시켜준다 한들 욥에게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을 덮어둔 채로 사느니, 그는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욥의 기도는 거칠고 도발적이었으며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원색적인 욥의 토로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욥의 입장


 우리 삶에 '설명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우리 인생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만 해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어디에서도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앞은 깜깜한 순간 말입니다. 어릴적 잠시라도 미아가 되어 보셨나요? 그때만큼 막막한 순간도 없겠지요. 어디로 움직이자니 자신이 없고, 그 자리에 서있자니 무섭고... 현재 욥의 상황은 아무런 가이드도, 경험도 없는 칠흑같은 어둠 가운데 버려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는 공포의 순간을 욥은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 우리는 욥을 도와주다가 도리어 그를 정죄하고 만 친구들의 주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친구들이 말하는 요지를 알고 있으니, 그들의 주장과 욥의 생각을 비교해보면서 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친구들과 욥의 생각 비교


 먼저 친구들의 신학과 욥의 신학을 알아봅시다. 친구들의 신학, 즉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리는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인과응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선한 일을 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으로 갚으시고 악하고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재앙과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이지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4:7-9)


그러나 욥도 이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과 논쟁할 때 이 부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욥은 그 신학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늘 순전히 행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복과 번영을 주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의 무서운 결말을 알았기에 늘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으로 살았습니다(1장). 문제는 그 신학과 원리가 지금 정반대로 작동한다는데 있습니다.


 다음으로 욥의 유죄 여부에 관한 문제입니다. 친구들은 이러한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면 욥은 죄인이 틀림없다고 결론내립니다. 이처럼 신속하고도 연속적이며 끔찍한 재앙은 욥이 악을 행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지요.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22:5-11)


 그러나 욥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건대, 이런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욥은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내 두 입술이 결코 악을 말하지 아니하고, 내 혀도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이네.
나는 결코 자네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 없네. 내가 죽더라도 내가 바르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겠네.
내가 나의 진실함을 굳게 붙들고 놓지 않을 것이며, 내 양심에 걸리는 것이 없을 것일세.
(27:4-6, 쉬운성경)


 욥은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한다. 어떤 것을 걸어도 좋다. 나는 무죄하다."라고 강력히 선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의 결론에 따르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욥입니다. 욥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따른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의롭게 살아왔고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는데도 끔찍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서? 그렇다면 욥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욥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든 설명하셔야만 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욥은 놀라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아래 말씀을 봅시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3)


어디에 가면 그분을 만날까? 그분이 계신 곳 가까이에 갈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 내 주장을 당당히 펼치고, 나의 무죄를 호소할 텐데.
(23:3-4, 쉬운성경)


 욥은 하나님과 직접 변론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이리 나오세요"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욥에게 주변 사람들의 조언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의 답답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이 세계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린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 욥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내 절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침묵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뒤좌우 어디서도 그분은 얼굴을 가리신 채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 모든 일에 상관하지 않는 듯한 느낌만을 던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동쪽으로 가도 그분은 아니 계시고, 서쪽을 돌아보아도 찾을 수 없구나.
그가 북쪽에서 일하실 텐데도, 뵐 수가 없고 그가 남쪽으로 돌이키시나, 그를 뵐 수 없구나.
(23:8-9, 쉬운성경)


 우리도 고난을 당할 때 이런 부분이 가장 힘겹지 않나요? 나는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은 나의 상황을 무시하고 팽개친 채 무심하게 계신 듯한 느낌, 하나님이 선한 자의 상급에도, 악한 자의 보응에도 관심이 없는 듯 팔짱을 끼신 것처럼 계실 때 우리는 많이 절망합니다.


엔도 슈사쿠 '침묵'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나오는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로드리고라는 포르투갈의 신부는 일본 선교를 위해 본토에 몰래 상륙하지만 이내 붙잡히게 되고, 농민 신자가 눈앞에서 무참히 처형당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로드리고 신부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단지 신자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참혹한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방관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 소리와 파리의 날개 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 농민이 오로지 당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정적이, 이런 고요가 계속되는가? 이 한낮의 고요함, 매미 소리. 이런 어리석고 참혹한 일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주1)



1) 엔도 슈사쿠 「침묵」(홍성사),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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