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Sep 11. 2020

5강 회의하는 신앙은 위험한가 (3)

욥의 신앙고백 (4-27, 29-31장)

불의가 넘쳐나는 세상  


 욥은 자신이 억울한 곤경에 처하자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정의롭게 운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평안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조금 길지만 욥기21:7-26을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은 소발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의인은 번성하고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라고 주장한 말에 욥이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조금 길지만 집중해서 읽어봅시다)


악한 자들이 오래 살며 늙을수록 점점 더 건강하니 어찌 된 일인가?
자식들이 든든히 자리를 잡고 후손들이 잘사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하지 않는가?
그들의 집은 태평무사하여 두려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없지 않는가?
황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암소는 유산하는 일이 없더군.
개구쟁이들을 양 새끼처럼 풀어놓으면, 그 어린것들이 마구 뛰어 놀며
소구를 두드리고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고 피리소리를 들으며 흥겨워하지 않는가?
일생 행복하게 지내다가 고요히 지하로 내려가더군.
기껏 하느님께 한다는 소리가 "우리 앞에서 비키시오. 당신의 가르침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소.
전능하신 분이 다 무엇인데 그를 섬기며 무슨 먹을 것이 있겠다고 그에게 빌랴!"
자기의 행운을 수중에 넣은 자들, 그 악한 자들의 생각이 어찌 하느님의 생각과 같으랴.
이러한 악인의 등불이 자주 꺼지던가? 재난이 그에게 떨어지던가?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시던가?
그들은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으며 삽시간에 폭풍에 쓸려가는 지푸라기와 같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비에게 줄 벌을 남겨두셨다가 그 자식들에게 내리신다."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말인가? 본인이 받을 줄로 알아야지.
제 파멸은 제 눈으로 보아야 하고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사약은 본인이 마셔야지.
살 만큼 살고 죽은 뒤에 집안이 어찌 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 그분을 깨우쳐드릴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숨질 때까지 기운이 뻗쳐 태평무사한 나날을 보내며
뱃가죽에는 기름이 돌고 뼛골이 싱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라린 가슴을 안고 숨을 거두는 사람, 행복이란 맛도 보지 못한 사람이 또한 있지 아니한가?
모두 티끌 위에 누우면 하나같이 구더기가 득실거릴 터인데.
(21:7-26, 공동번역)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다고 하던데, 실제로 얼마나 그렇게 하시더냐? 악인이 고통을 당하기나 하더냐?"


 욥은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악인들의 삶과 그들의 결말을 말합니다. 먼저 악인들의 재산입니다. 그들의 삶은 그렇게 풍요로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가축조차 낙태하는 일이 없습니다. 악인들의 삶은 모든 것이 형통합니다. 그 뿐인가요? 악인들의 가정도 평안과 즐거움 그 자체입니다. 그들의 가정은 수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며 늘 노래하고 춤추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양심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없고, 기도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이토록 나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심판을 내리시나요? 사실 심판을 내리시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욥의 결론입니다. 악인이 보응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입니다. 그들은 심판받기는커녕 늘 자신만만하고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해도 그 자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리라"


 그러나 욥은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죽고 나면 그만이지, 자손들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 죄를 지은 놈이 벌을 받아야 할 게 아니냐"


 악인은 그 최후마저도 고통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바라는 죽음,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고요하고 평안하게 죽는 것이지요. 평생을 행복 가운데 보내다가 아픔도 없이 말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은 악한 자들이 제대로 심판받는 광경을 얼마나 보셨나요? 선한 자들이 보상을 받는 사례는 얼마나 경험하셨나요? 세상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돌아간다고 느낀 적은 얼마나 되시나요? 아마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인 것이지요.


 세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비웃듯 부조리를 즐기며 돌아갑니다. 부는 세습되고 가난도 세습됩니다. 홀어머니를 모시며 아르바이트와 대학 공부를 병행하는 가련한 학생에게는 암이 찾아옵니다. 공부할 의지도, 꿈도 없이 마약을 하는 재벌집 아들에게는 오늘밤 클럽이 임시 휴업을 한다는 소식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수 년을 훈련받으며 파송받은 선교사가 그 나라로 가는 길에 가족들과 함께 여객기 추락사고를 당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른 채 사는 사람은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고층 아파트 욕실에 몸을 담그며 '어~ 좋다. 천국이 이만하나?'라며 하루를 즐깁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해석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너무나 가볍게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 설교들은 모두 한국교회 강단에서 실제로 설교된 내용들입니다.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 쓰나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곳은 인구 3분의 2가 무슬림들이고 기독교인들도 많이 죽었기 때문이지요.

주일날 교회 안 가고 휴가 즐기러 간 사람들도 심판받은거에요."


 "잘 보세요. 세계에서 굶주리고 못 사는 나라들은 다 예수 안 믿는 나라입니다.

기독교 국가들 보면 다 선진국이고 잘 살아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전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침몰시키신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 하니 꽃다운 아이들을 침몰시키며 국민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너무나 쉬운 현실 해석들


 이 설교내용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그럴듯 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진 재앙과 불평등에 대해 기독교적 교리를 적용한 것이지요. 이들의 현실 해석은 너무나 깔끔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말대로일까요? 미국에서 일어난 911 사태와 그로 인한 사상자들은 그들이 기독교 국가가 아니어서였을까요? 호주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은? 그리고 기독교 국가들의 부요함 이면에 자행되는 끔찍한 죄악들은? 이처럼 단편적인 교리에 의거한 일차원적 현실 해석은 무수한 추가 의문들을 낳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깔끔한 신학적 교리로 정리해버릴수록 예외적인 반론들도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를 것입니다. 이런 해석들은 옳지도 않을뿐더러, 2차적 모욕과 피해들을 양산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끔찍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리 없어" 라는 선입견을 붙든 채 욥을 죄인을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손쉽고 깔끔한 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길이 남을 신앙고백 


  지금까지 우리는 욥의 방황과 간구를 지켜보았습니다. 어떤 것을 느끼시나요? 그의 비통한 고백과 몸부림은 그저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지금 욥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욥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을 외면하실 뿐 아니라 노려보시며 이를 갈고 뼈를 꺾으시며 목을 부러뜨리시며 과녁 삼아 활을 쏘시며 용사같이 달려들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욥은 길이 남을 신앙고백을 올려드립니다.


내 구세주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결국 그가 땅에 서실 것이네.
내 가죽이 썩은 후에라도, 이 몸이 썩은 후에라도 내가 하나님을 뵐 것이네
(19:25-26, 쉬운성경) 


 욥은 하나님을 ‘고엘’, 즉 구속자로 고백합니다. 마치 막대기로 자신을 죽일 듯이 때리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울며 매달리는 어린이와 같이 말이지요. 욥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모든 증거가 바닥난 상태에서도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부활해서라도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합니다.


욥의 신앙고백


 우리가 주목하며 본받아야 할 것은, 아무런 신학적 기반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욥이 ‘하나님과의 대면’을 시도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문제 앞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쭙잖은 친구들의 단편적 교리에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엄과 두려움을 알고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요? 탄탄한 교리와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문제를 가지고 기도로 씨름해보지도 못한 채 침륜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나요?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은의자」편에서 퍼들글럼이라는 인물은 마녀의 치명적 공격을 받습니다. 마녀의 주술은 (하나님의 나라로 비유되는) 나니아 세계를 완전히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퍼들글럼은 마녀의 주술 앞에 괴로워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의 말처럼 우리가 꿈을 꾸었다고 칩시다. 나무와 풀과 태양과 달과 별들, 아슬란(*예수 그리스도를 상징)님까지 모두 꿈이었다고!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오. 설령 우리를 이끌어 주는 아슬란 님이 없다고 해도 난 아슬란 님의 편에 서 있겠소. 설령 나니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 지하 세계를 벗어나 나니아를 찾는데 평생을 바치겠단 말이오!”  주1)



나니아연대기 '은의자' 편 삽화


 욥기에서 욥의 고뇌가 서술된 부분들은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으며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회의의 순간을 준비하게 해 줍니다. 캄캄하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주변 아무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분을 향해 거칠게 질문하는 한 남자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단편적인 교리를 갖고 억지스레 상황을 끼워맞추려는 '안정적인 시도'를 배격합니다. 그대신, 자신이 내딛는 걸음이 한없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없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욥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보호로 상징된 울타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 인생의 전부인 하나님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원리나 철학이 아니라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1) C.S.루이스, 「나니아 나라 이야기 6, "은의자"」 (시공주니어), p.2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