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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15. 2020

6강 지혜는 어떻게 경험하는가 (1)

욥기의 꽃, 28장 (28, 32-37장)

 어릴적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나본 기억이 있었나요? 아마 혼나보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만큼, 내 습관과 생활양식에 변화가 있을 정도로 자극을 받았던 사례가 있었나요?


 고통은 아프지만, 때로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이 '죄의 결과냐 아니냐'로 갑론을박을 벌이는 욥과 친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반드시 죄로부터 말미암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난의 원인에 관해 양 극단의 의견이 오갔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고난에 대한 제 3의 의견도 있다는 것을 공부해 볼 것입니다. 또한 욥기의 꽃이라 불리우는 28장을 읽어보며 지혜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먼저 28장부터 보도록 합시다.




갑작스러운 사회자 등장?


 28장은 주석가들로부터 '지혜의 장'이라고 불리웁니다. 28장의 위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욥기 28장의 위치


 즉, 욥과 욥의 친구들이 설전을 주고받으며 총 3회전을 마친 후, 29장부터 31장까지 욥의 최후 변론이 이어집니다. 28장은 친구들과의 논쟁, 욥의 최후변론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8장의 화자는 지금까지의 등장인물이 아닌 제 3의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에는 28장의 내용상 어색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1)


 28장은 비유컨대 이런 분위기입니다. 조선 영조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연극을 본다고 합시다. 무대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심문하며 호되게 몰아붙입니다. 사도세자는 자비를 호소하지만 영조는 아랑곳않고 눈을 부라리며 신하들에게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몇몇 대신들이 말리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갈등은 절정으로 치솟고 사도세자는 뒤주속으로 갇히는데, 이 때 갑자기 모든 배우들의 동작이 멈추고,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 정장을 입은 한 사람이 걸어나오더니 관객들을 향해 설명을 합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까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살펴보셨습니다. 영조는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를 향해 지나칠 정도로 모진 모습을 보이는데 이 원인에 대해 어떤 역사학자는 이러 이러한 주장을 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입장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 이러합니다. 자,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 그의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될까요? 계속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무대 뒤로 퇴장을 하고 배우들은 다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28장이 이 사회자와 같은 분위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이 오나요? 지금까지 욥과 친구들은 인신공격의 수준으로 서로를 비방하며 논쟁했습니다. 이제 친구들은 입을 닫았고 욥은 최후변론을 막 진행하려 하는 찰나입니다. 이 때 28장을 말하는 사회자가 등장하여 급박한 분위기를 잠시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잠시 숨을 돌리고 논쟁 가운데 무언가 생각할 기회를 줍니다. 분위기를 이해하셨지요? 그럼 28장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인간의 성취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28:1-4)


 28장은 광물과 귀금속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은과 금, 철, 동과 같은 광석은 땅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어둠을 뚫고 연구하여 지하 갱도로부터 광석을 구하고야 맙니다.


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으며
반석에 수로를 터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누수를 막아 스며 나가지 않게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느니라
(28:6-11)


깊은 곳을 탐구하고 찾아내는 인간의 지혜


 청옥과 사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날며 시력이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솔개나 매도 그런 보석이 숨겨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힘이 있고 용감한 사자라 할지라도 숨겨진 광물들을 탐지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지혜를 발휘하여 땅을 뚫고 바위를 헤쳐 보물을 발견하고야 맙니다. 보석이 지하수와 함께 터져나온다 해도 사람은 보석만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28장의 화자는 이처럼 인간이 축적한 지식과 능력의 뛰어남을 예찬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만 봐도 경이롭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첨단 기술들이 놀랍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보았던 SF 만화의 상상들이 많은 부분 현실화되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기술이 그 만화의 상상을 앞지르기도 했습니다. 산업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증을 자아낼 정도로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 총명함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지구의 멸망을 앞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인터스텔라」의 유명한 카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더 높은 성취를 갈구하는 인류의 도전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본 장의 화자는 이런 인간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어디에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28:12-13)


 바로 '지혜'가 있는 곳, 인간은 그곳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하 깊은 곳을 뚫어서라도 보물을 찾아내고야 마는 인간도 그것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28:14-15)


 지혜는 은밀함의 극치인 깊은 물도, 바다도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숨겨져 있습니다.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28:15-19)


 지혜의 가치는 인간이 머리를 쓰고 수고해서 찾아낸 보석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순금, 은, 청옥수, 남보석, 황금, 수정, 진주, 벽옥, 산호.... 본문에 나열된 값비싼 귀금속들로도 지혜를 살 수 없습니다.


 찾을 수도 없고, 찾는다 해도 인간이 갖고 있는 귀한 것들과 바꿀 수도 없는 지혜, 여러분은 본문이 말하는 '지혜'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일을 잘 풀어나갈 수 있는 총명함? 세상을 요령있게 살아갈 수 있는 처세술? 남들이 잘 생각지 못하는 아이디어? 사람들이 지혜를 말할 때는 주로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둡니다. 하지만 지금 욥기 28장이 말하는 지혜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잠시만 생각을 해 봅시다. 한 순간에 처참한 사건들을 경험한 욥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자신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요? 이 재앙들에 대해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친구들은 그런 몸부림들이 헛수고라고 말합니다. 그 씨름과 질문들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28장은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지요?


 28장에서 말하는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과 원리', 즉,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 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혜는 인간이(아니 그 어떤 피조물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법칙과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들에게까지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8:23-26)


 이처럼 신비롭고 놀라운 지혜는 인간의 한계를 비웃습니다. 의학, 과학, 생명과 물질, 시공간과 우주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학자들은 인간의 지식과 성취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지혜는 비단 이런 과학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화와 복, 태어나고 죽게 되는 시와 때, 어떠한 시기에 맞이하게 되는 시련이나 기쁨과 같은 인생의 질서들은 인간의 손길로부터 더욱 먼 곳에 있습니다. 통계, 별자리, 점술, 관상 등, 과거로부터 이런 것들을 예측하거나 맞춰보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하나같이 좌절의 결과만 맞이하게 될 뿐이었지 않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이 지혜는 인간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공부를 더 한다고, 머리가 더 좋다고, 권력이나 리더십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에서 이 지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도전서 2:6-8)


 인간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영광의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끔찍한 일을 저질러버렸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죽임에 내어준 사람들은 대부분 모세오경과 선지서에 능통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39)


 지혜가 성경을 머리로 연구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몰라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아버지다우신 사랑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는 (특히 두 번째에 대해서는) 가장 위대하다는 천재들도 두더지보다도 더 무지몽매하다.”  주2)


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을 사는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주로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석학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정치인과 과학 기술자들은 인공위성 발사에 앞서 돼지머리를 앞에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그들은 수많은 논리적 이유를 제시하며 하나님을 부인하지요. 반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네 살짜리 아이라도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셨나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셨나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는 우리가 머리를 써서 탐구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28:20-22)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숨겨졌을 뿐 아니라 영적인 존재인 '멸망'과 '사망'조차 그에 대한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28장의 화자는 이 지혜에 대해 단호하게 결론내립니다.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28:27-28)


 28장의 화자는 지혜를 경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주를 경외하고 악을 떠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얼핏 보기에는 친구들이 제시한 해결책과 유사해 보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려라"는 권면을 욥에게 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이 구절은 친구들의 주장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써 이를 제시했지만, 본문이 말하는 경외함은 하나님의 주권적 일하심에 대한 총체적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설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가 나에게 손해나 재앙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을 사랑하며 신뢰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3)   주를 경외하고 악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지혜를 맛보았던 경험이 있나요? 성경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이런 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편 31:19)


 다윗은 뼈가 녹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의 진실을 발견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쌓아 두신 은혜’를 말이지요. 이것은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본 것입니다.


 또한 시편 73편에서,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부조리한 상황들로 인해 거의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2절).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운데 악인의 결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73:17)


 또한 하박국 선지자는 민족의 멸망과 악한 나라들의 흥왕을 목도하며 하나님께 질문을 토해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 하박국은 낙심과 쓰라림의 감정을 딛고 일어나 확신과 기쁨의 찬양을 올립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3:17-19)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의 사정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여전히 답답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상 이면에 있는 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허락되었을 때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해석 불가능한 내용들을 확인한 것이지요. 그들의 기도는 거칠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신뢰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해석과 답변을 듣기 소망했고, 이를 위해 파수꾼과 같이 기다렸습니다(하박국2:1).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 이것만이 인간의 고통과 정의에 관한 비밀로 초청받는 방법입니다. 지혜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혜를 허락하실 때 인간은 이 비밀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해 단편적인 교리로 해석하는 친구들과, 미지의 하나님께 달려가려는 욥의 치열한 논쟁 사이에서 28장은 어렴풋한 길 하나를 밝혀 주는 것입니다.



1) 데이비드 앗킨슨, 「욥기 강해」(IVP), p.135,  ※ 그러나 본문이 욥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음.

2) 존 칼빈 「기독교 강요1」(크리스챤다이제스트), p.335

3)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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