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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18. 2020

6강 지혜는 어떻게 경험하는가 (2)

엘리후의 등장 (32-37장)

엘리후라는 청년


 이후 29-31장의 세 장에 걸쳐서는 '욥의 최후변론'이라 불리우는 욥의 말들이 이어집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울타리로 보호해 주시던 지난 시간을 추억함(29장)과 동시에 현재의 처참한 상황을 한탄합니다(30장). 그리고 뒤이어 자신이 얼마나 거짓없고 의로운 삶을 살았는지 확신에 찬 진술을 합니다(31장). 이제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야 할 타이밍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후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32-37장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합니다.


 엘리후는 특이한 인물입니다. 욥기가 신학적 쟁점이 많은 성경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 쟁점 중에 빠지지 않는 부분이 엘리후의 주장이 있는 32-37장입니다. 먼저 엘리후는 지금까지 소개된 바 없는 사람입니다. 시작 부분에 소개되지 않았을뿐더러 결말 부분에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42장에서 욥의 의로움을 증명해주시고 친구들을 책망하시는 구절들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42:7)


 엘리바스에게 '너와 두 친구'라고 말씀하셨으니 나머지 둘은 빌닷과 소발이겠지요? 그러나 엘리후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그는 욥기에서 딱 32-37장에만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엘리후의 말들이 세 친구들의 주장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똑같이 욥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회개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 친구들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실상 욥기에서 엘리후의 발언 부분을 떼어내더라도 일관성에 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적지 않은 신학자들은 엘리후의 말을 '편집자의 2차 삽입'이라고 주장합니다. 주1)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현재 욥기라는 성경에서는 엘리후의 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은 욥기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고난에 대한 친구들과 욥의 쟁점이 무엇이었나요? 바로 "고난이 죄로 인함이냐 아니냐?" 였습니다. 이 주제의 논쟁이 길어질수록 각자의 주장은 첨예해지고 극단적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고난의 원인이 딱 이 둘 중 하나일까요? 치열한 논쟁 가운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일어섭니다.


 "잠시만요! 저도 한 마디만 좀 할께요."


 비유하자면 이 사람은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입니다. 뮤지컬이나 연극, 혹은 TV 쇼에서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지요? 배우들이 재미나 의미전달을 더하기 위해 관객을 무대로 끌고오는 경우 말입니다. 바로 엘리후가 욥기에서 이런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메인 스토리를 중간에 멈추고 갑자기 나타나 제 3의 의견을 피력하는 (욥기를 읽고 있는) 관객, 혹은 시청자인 것이지요. 주2)  욥기는 놀랍게도 욥과 친구들의 양극단의 논쟁이 절정을 찍었을 때, 제 3자를 등장시키며 주위를 환기시킵니다. 그러면 '갑툭튀' 엘리후는 왜 등장했을까요?


엘리후의 등장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해석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32:1-10)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욥과 친구들보다 연소한 자임을 밝힙니다. 엘리후도 어르신들의 논쟁에 버릇없이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양상을 지켜보자니,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을 하고 친구들은 욥의 말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에 엘리후는 "나이가 많다고 다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을 주시면 나같이 젊은 사람도 한마디 할 수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말을 시작합니다.


 엘리후 역시 욥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그 주장을 비판합니다. 그는 욥이 한 말들을 직접 요약합니다.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33:8-11)


 즉 엘리후는 욥의 주장을 ① 나는 무죄하다 ② 하나님이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그는 욥의 이런 주장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고난으로 인한 욥의 반응을 문제삼습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친구들이 욥에게 보였던, 고난의 원인에 관한 색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잠깐만 복습을 해 봅시다. 친구들은 욥이 겪는 현재의 고난에 대해 무어라 말했지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4:7, 엘리바스의 말)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18:5-7, 빌닷의 말)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11:20, 소발의 말)


 이와같이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모두 욥의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이보다 더 진보적인 의견을 내 놓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하나님께서 답변을 하지 않으신다고 불만을 터뜨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분은 사람이 곤히 잠들었을 때, 밤중의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시지요.
사람들의 귀를 살짝 여시고 말씀하셔서,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교만하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무덤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시고, 칼에 죽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33:13-18, 쉬운성경)


 욥이 "하나님은 내게 답이 없으시다. 나는 그분의 대답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탄식한 반면, 엘리후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당신이 느끼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며 욥을 일깨우려 합니다. 엘리후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죄를 향해 달려가는 인간이 멸망하지 않도록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정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이 깨닫게 하시려고 뼈마디가 쑤시는 아픔과 고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럴 땐 밥맛도 없고 진수성찬도 귀찮아지며,
몸은 수척해지고 숨어 있던 뼈마디가 울퉁불퉁 튀어나오지요.
그럼 결국 무덤에 떨어지고 사망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33:19-22, 쉬운성경)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색다른 해석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그의 주장은 욥의 세 친구들과 차별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감각하고 방탕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신다는 것이지요. 즉, 고통은 인간을 위한 선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 줍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기쁘게 들으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정말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 차게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찬양하면서, '나는 죄를 지었소. 부정한 짓을 저질렀지요. 그러나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무덤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렇게 환한 세상을 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람들을 이렇게 다루시지요.
무덤에 내려가던 사람을 다시 살리셔서, 생명이 약동하게 하십니다
(33:26-30, 쉬운성경)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사람을 인도하시고 재창조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고난은 죄의 결과다"라는 세 친구의 견해에 비해 분명히 긍정적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창조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질병이나 고통까지도 인간의 영혼을 훈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사바늘의 따끔함이나 살을 칼로 째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듯이, 혹은 갈등이 사람간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드는 계기가 되듯이, 고통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가운데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명저 「고통의 문제」에서, 인간은 소망없는 죄인이며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존재라고 변증합니다. 그는 이 내용에 책 절반가량의 분량을 할애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고통이라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  

우리는 이른바 '나의 삶'이 즐겁게 느껴질 동안에는 그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

따라서 설령 고통 그 자체에는 영적인 가치가 없다 해도 두려움과 연민에 영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런 두려움과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고통은 존재해야 합니다 주3)


 여러분에게도 자신을 더욱 단단하고 성숙하게 한 시련의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고난을 당할 때는 "나를 왜 이런 환경에 처하게 하셨나!"라고 영문을 모른 채 울며 힘들어했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경험 말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주는 속성이 있습니다. 엘리후는 신선한 감수성으로 이 부분을 일깨우는 것이지요.




1)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235

2) 김기석 「성서학당 '욥기'편 17강」, CBS 방송분 中

3)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홍성사), 6장 인간의 고통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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