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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22. 2020

6강 지혜는 어떻게 경험하는가 (3)

엘리후라는 인물의 한계와 의의 (32-37장)

엘리후의 한계


 그러나 엘리후의 말은 이같이 참신하지만은 않습니다. 욥을 향한 그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보입니다. 엘리후는 욥을 비판하기 위해 욥이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재차 요약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입견과 왜곡이 있습니다.


욥은 '나는 의롭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옳지 않게 여기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정직한데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한다. 죄도 없는데 그분이 나를 쳐서 죽이려 하신다.'
세상에 이렇게 옳지 못한 말을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가 바로 악인들의 친구요, 불의한 사람들의 친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욥은 겨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도 별수가 없다!'라는 소리를 합니다.
(34:5-9, 쉬운성경)


 엘리후가 요약, 평가한 욥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욥은 분명 현재의 고난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완전무결하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인정했고, 자신이 그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욥은 지금 상황을 기계적인 죄-형벌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친밀했던 하나님이 특별한 이유없이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드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이러한 욥의 심경을 헤아리지 않고 욥의 말의 일부만 따와 왜곡하여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이 내뱉은 절망의 말들은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려 시도하다가 부딪치게 된 차디찬 벽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판단할 때는 그 말을 하게된 배경과 심정을 헤아려야 하는데 엘리후는 말 자체만 가지고 사람을 단정짓고 평가합니다. 이런 엘리후의 모습은 우리가 결코 닮지 말아야 하는 반면교사인 것입니다.


 또한 엘리후의 사상은 세 친구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악하게 행하실 수 없으며 전능자는 공의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땅의 왕으로 세우셨습니까? 누가 하나님께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까?
만일 그분이 자기만 생각하셔서 영과 숨기운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이 다 망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총명한 욥 어르신, 내 말 뜻을 아시겠지요. 내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공의를 미워하시는 분이라면 그가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당신이 의로우신 전능자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34:12-17, 쉬운성경)


 '하나님이 진정 공의로우신가'를 회의하는 욥을 향해 엘리후는 '답정너'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걸 왜 고민해? 하나님이 세상을 의롭게 다스리신다는 것은 신앙의 전제조건 아니야? 답이 명백한 것을 왜 고민하냐?"



엘리후의 주장


 이런 사실을 욥이 몰라서 회의를 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문을 품고 있지만,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쉽게 결론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비탄과 토로가 섞여 나온 것이지요. 이런 욥을 향해 엘리후는 "네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정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것이다."라며 그를 정죄합니다. 젊은 엘리후는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성급하게 욥을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총명한 자가 말하며, 내 말을 듣는 자가 말합니다.
'욥의 말은 무식하고 지혜가 부족하지.'
나는 당신이 자기의 죄를 인정할 때까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여전히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듯 손뼉을 쳐대며 하나님께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34:34-37, 쉬운성경)


 엘리후는 친구들처럼 욥이 죄인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말하는 '고난의 교육적 측면'도 이런 전제에서 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더 큰 악으로 치닫지 않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엘리후의 말투는 친구들 이상으로 무례합니다. 그는 욥이 더 고난을 받아야 정신을 차릴것이라는 매정한 말까지 뱉어냅니다. 무엇보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분노하는 행위를 가혹하게 정죄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지, 분을 내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라는 것이 엘리후의 주장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자들은 마음에 원망을 품고 그분이 벌을 내리실 때에도,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부도덕하게 살다가 일찍 죽고 맙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이 고난당할 때, 그분께서 구해 주시고, 고통당할 때에 귀를 여시지요.
그분은 당신을 위험에서 끌어 내어 평안의 자리로 인도해 주셨고, 기름진 음식으로 늘 채워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은 악인이 받아야 할 그 심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이 화난다고 조소할까 두렵군요. 많은 뇌물 때문에 곁길로 가지 마십시오.
당신의 재물을 다 허비하더라도, 그 고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죽어 가는 그 밤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더 이상 죄를 짓지 마십시오. 괴롭다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요?
(36:13-21, 쉬운성경)


 이처럼 엘리후는 하나님의 공정한 통치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행위이고 스스로에게 해악을 끼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 이 세상이 항상 공평하고 정의롭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부당하게 학대받고 고통받는 이들이 분명 있습니다. 엘리후가 맞다면 이런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는 이에 대해서도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학대를 받으면 부르짖으며 벗어나려고 애원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밤중에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짐승보다 낫도록 가르치시고, 공중의 새보다 지혜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악인들의 교만한 자세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헛된 말로 부르짖는 것을 듣지 않으시며, 전능자는 그런 기도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십니다.
(35:9-13, 쉬운성경)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통치하시는 세상에 여전히 학대가 자행되는 이유가,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욕심으로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물리치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해석은 어떤 측면에서 무섭습니다.


 "기도했는데도 고난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기도하는 너의 마음 자세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영적 처방은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부담을 당사자에게 지워버리는, 사실상 무책임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여리거나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이런 대책없는 치료에 죄책감을 느끼며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엘리후와 같은 해석은 이유없이 학대받은 이들의 심경을 더욱 찢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양을 할 때, 혹은 누군가를 위로할 때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듯했던 엘리후의 주장은 이처럼 실망스러운 내용으로 추락해버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의 설교 하나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연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


 소위 절경이라 불리는 장소에 직접 가보신 적이 있나요? 미국의 그랜드 캐년, 중국의 장가게, 오로라가 펼쳐지는 그린란드..., 혹은 놀라운 자연현상을 두 눈으로 목격해보신 적이 있나요? 번개가 번쩍 하며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리꽂는 장면이라던가, 별똥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우리는 이런 광경을 볼 때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이라는 찬양을 가슴벅찬 마음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의 신비로움은, 일상에 함몰된 인간의 시선을 창조주로 향하게 만들어줍니다.


 엘리후는 후반부에서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찬송하며 욥을 설득합니다.


하나님은 물방울을 끌어올리시고, 그것이 비가 되어 시냇물에 떨어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구름 속에 비를 싸 두셨다가,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쏟아 붓습니다.
구름이 어떻게 널려 있는지, 그분이 천둥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모두 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36:27-29, 쉬운성경)


 엘리후는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는 구름과 비, 천둥의 신비를 창조주의 손길로 표현합니다. 비를 저축하시는 분도, 그것을 때에 맞게 내리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런 자연질서는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천둥 소리는 정말 놀랍습니다. 사람이 이해 못할 엄청난 일들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에게 '땅에 내려라' 하고 명령하시고 쏟아지는 폭우에게 '세차게 퍼부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들이 알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37:5-7, 쉬운성경)


 인간이 스스로 한없이 교만해질 때 천둥과 폭설, 폭우를 경험하면 '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토록 무력한 존재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남쪽에서는 폭풍이 불어오고 북쪽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며,
하나님께서 내뿜으시는 입 기운에 얼음이 생기고, 넓은 호숫물조차 꽁꽁 얼어붙습니다.
그분은 구름에 습기를 가득 채우시고, 구름 사이로 번갯불을 번쩍거리시지요.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온 세상에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분은 사람을 벌하실 때나 땅에 비를 내리실 때, 징계하실 때나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실 때, 구름을 사용하십니다.
(37:9-13, 쉬운성경)


 하나님은 폭풍과 찬 바람으로 얼음을 만드시고 구름을 통해 번개를 내리십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의 섭리를 도구로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에 따르면 하나님은 경배와 찬송의 대상이지 의심과 회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대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엘리후는 그런 죄악된(?) 마음이 들 때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이 만들고 운영하시는 자연 세계를 바라보라고 제안합니다. 그분의 일하심은 신비 그 자체이며 실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신묘막측하여 인간이 감히 헤아려 볼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께 의문을 품다니! 엘리후는 바로 그것이 불신앙이라고 욥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엘리후가 전적으로 옳을까요? 물론 사도 바울도 엘리후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며 로마서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에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나는 하나님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고 변명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엘리후가 열정을 다해 설교하는 이 주제를 욥이 모르고 있었을까요? 욥이 엘리후에 비해 피조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신성을 묵상하지 않았을까요? 빌닷과 논쟁하며 말한 욥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은 땅을 흔드시고, 땅을 떠받치는 기둥들도 흔들어 버리시지.
그분은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다네.
홀로 창공을 우주에 펼치시고, 바다의 파도 위를 걸으시는 분,
그분은 북두칠성과 삼성, 묘성과 남방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과 수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네.
(9:6-10, 쉬운성경 - 욥이 빌닷에게 한 말)


 엘리후가 알고 있는 것들은 욥이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욥의 말과 그의 경외함을 비추어보았을 때 욥은 엘리후 이상으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하심을 찬송해왔을 것입니다. 주1)  문제는 이러한 자연의 신비도 지금 욥의 상황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하늘과 땅의 놀라움을 통해 욥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게 놀라운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내가 감히 의심하다니!"


가 아니라,


 "이렇게 놀라운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지금 나에게?"


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신비를 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계속되는 가뭄이나 홍수, 자연재해를 섣불리 하나님의 심판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요? 쓰촨성, 고베 등에서 일어난 지진을 가지고 "이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교육이다. 그들로 하여금 더 큰 멸망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이다."라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요?  주2)  엘리후가 설교한 내용은 아름답고 귀감이 되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을 향한 회의와 질문을 묵살해버리는 것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놀라움 조차도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정답을 제공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와 그의 말이 욥기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다시 학자들이 쟁점으로 삼고 있는 주제로 돌아와 봅시다. 엘리후의 말들은 굳이 왜 욥기 안에 포함되었을까요? 그의 말들은 미숙한 젊은이가 혈기를 갖고 무언가 해보려 하다가 다시 실망을 주고 마는 내용입니다. 엘리후가 내린 결론은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량은 여섯 장이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 상에서 엘리후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많은 실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엘리후의 말들은 욥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먼저 엘리후는 극단으로 치닫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다양성을 부여하며, 욥기라는 성경을 보다 심오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난이 죄의 징벌이냐 아니냐?"라는 싸움을 오래도록 지켜본 독자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단조로운 느낌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엘리후는 고난에 대한 제3의 의견을 제시하며 독자들의 답답함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해 줍니다. 즉, 고난은 우리를 더 큰 곤경으로부터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메시지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을 대부분 연단과 훈련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보면 그 해석이 옳았다고 느낀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에서 서술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악된 우리를 온전한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훈련과 연단은 불가피하며, 그것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시련의 상당수는 이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비중이 큰 '성숙'이라는 목적을, 고난에 대한 논쟁에서 빼버린다면 욥기는 편협한 성경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요?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엘리후의 해석은 세 친구들에 비해 진보적이고, 그의 수사, 특히 36-37장의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경탄하며 서술하는 부분은 탁월합니다. 이는 뒤이어 등장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유사한 문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욥의 문제를 해석하는데 있어 틀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욥기가 보여주는 ‘인간 지혜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근접하게 다가가 세상을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결국 오류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가 된 것입니다.




1)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267

2)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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