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운 하나님의 등장 (38-42:6)
톰 새디악 감독의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 2003)에서 지방 방송국의 리포터로 일하는 브루스(짐 캐리)는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신(모건 프리먼)을 만나게 되고, 잠시 신의 역할을 대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의 능력을 갖게 되고 갖가지 기적을 일으킵니다. 레스토랑에서 토마토 스프를 홍해 가르듯 갈라버리고, 말 안 듣는 강아지를 명해서 변기에 앉아 쉬 하게 만들며, 자신의 앵커 자리를 빼앗은 리포터를 골탕 먹입니다. 그는 신의 능력을 갖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피조세계의 모든 것이 브루스의 통치 아래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된다는 것은 단지 신의 능력만 갖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잡고 있어야 했고,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브루스는 엄청난 속도로 쌓여오는 전 세계 사람들의 기도 리스트를 보게 됩니다. 귀찮음을 느낀 브루스는 모든 기도에‘Yes'로 응답하도록 자동설정을 해 버리고 나가버립니다.
브루스가 다른 문제로 신경을 쓰고 있을때, Yes로 자동응답 처리한 기도제목들이 일제히 실행되기 시작합니다. 복권 당첨자가 쏟아져 나오고 NHL 만년 하위팀이 스탠리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사람들의 욕망들이 응답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기적이고 악한 기도들마저‘Yes’로 처리되자 거리에는 폭동이 일어나고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에 종종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놔두진 않을 텐데.”라는 불만도 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유지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 자체가 인간이 감당하기에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먼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굳이 브루스처럼 신이 되어보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욥이 끔찍한 일들을 당한 이후, 서른 여섯 장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요? 이제 하나님이 이 모든 의문들을 해결해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훌륭하게 사탄의 시험을 이긴 욥을 칭찬해주시고, 욥이 그토록 갈망했던 대답들을 따스한 음성으로 설명해 주시고, 욥이 믿음을 지킨 것이 얼마나 옳고 귀한 일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실 것을 우리 모두는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 하나님은 그 기나긴 침묵을 뚫고 나타나셨음에도 우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말씀들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하나님께서 등장하시는 38장부터 마지막 장인 42장의 6절까지입니다. 비로소 나타나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욥의 반응이 주요 내용이지요. 하나님의 등장으로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분위기면 좋겠지만, 아직 긴장은 한 번 더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본문들을 살펴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8:1-2)
하나님은 찬란한 빛이 내리쬐는 배경과 은은하게 퍼지는 아우라와 아름다운 하프 반주 가운데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고생한 욥에게 따스함으로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에서', 커다란 위엄과 두려움으로 지금 욥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첫 말씀이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입니다. 이를 공동번역으로 보면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쉬운 성경은,
"무식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서른 여섯장에 걸친 욥과 친구의 대화들을 '부질없는 말', '무식한 말'로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혜를 최대한으로 쥐어짜낸 논쟁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어둡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다름아닌 욥입니다. 욥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은 곧이어 질문들을 퍼부으며 욥을 몰아붙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욥기의 백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한 내용들을 살펴봅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38:4-11)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에 일어난 일들을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대지를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계획과 설계가 있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한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바다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다가 모태에서 나오는 것처럼 터져나올 때 하나님은 그것의 한계를 정하시고 "여기까지만 너의 영역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서운 바다가 육지 전체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한을 걸어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어떤 민담에서는, 천상에서 내려온 거인이 손으로 땅을 팠더니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는 계곡이 되었고 깊숙히 패인 곳은 바다가 되었으며 그 흙들이 쌓인 곳은 산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 세계의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그처럼 마구잡이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흙 한 톨 조차도 그분의 계획 아래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 일들이 얼마나 위대했던지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서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장엄한 신비인 창조를 행하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느냐? 이 모든 원리들을 너는 이해하느냐?"
하나님은 욥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으시며 다음 질문들을 이어가십니다.
(꽤 길지만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38:12-38)
아침과 밤, 낮, 새벽의 운영원리, 바다의 깊은 곳들, 죽음의 세계, 빛과 어둠이 다니는 길, 별, 번개, 구름, 흙, 눈, 우박 빛, 바람 비....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부터 영적인 세계에까지 피조세계는 우연처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목적과 계획을 갖고 운영하십니다. 그러나 욥은 깊은 새벽의 자리가 어디인지, 바다의 물 원천이 되는 샘이 어디인지, 땅의 너비가 얼마나 되는지, 빛의 원천이 어느 곳에 있는지, 우박이 저장된 곳이 어디인지(그리고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저장해 놓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욥은 하늘의 별이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묶여있을 수 있는 원리도 모릅니다. 심지어 가장 작은 이슬방울의 원리조차 이해할 수 없고 수탉이 제때에 울게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무지할 뿐입니다. 자연의 거대한 흐름부터 발 밑에서 돋아나는 작은 풀의 원리까지, 피조물의 신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이지요.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더욱 놀랍습니다.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38:39-39:30)
욥은 이러한 동물들이 살아가는 원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타조는 왜 지혜가 없고 그 대신에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는지, 매는 왜 남쪽으로 향해 날아가는지…
우리는 동물의 세계나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놀라움과 신비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이런 대자연의 원리들을 욥에게 들이미시며 하나라도 알면 대답해보라고 몰아붙이고 계십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다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욥아,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너에게 고난이 찾아왔던거야.”
하나님은 왜 1,2장의 이야기를 욥에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모든 것을 상실한 채 피투성이가 된 당신의 종을 이토록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계실까요? 욥기를 읽어나가는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행위 자체는 몹시 의문스럽지만, 우선 하나님이 왜 ‘설명’ 대신 ‘질문’을 택하셨는지는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1,2장에서 천상회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천상회의 내용을 '보았을' 뿐, '이해했던' 것은 아닙니다. 즉,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던 사연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정당한 이유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본 장면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억지스레 납득하려고 노력할수록 질문들만 늘어나고, '하나님은 사람을 놓고 게임을 하셨다'는 왜곡된 결론밖에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욥에게는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천상회의의 내용을 알려주신다면 욥은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것도 (욥기라는 성경의 이해를 위해) 하늘의 신비 그 일부만 살짝 열려진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머리로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기에 분명 넘지 못할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땅에서 먹이를 나르는 개미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가용성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질문의 무게를 감당할만한 저울이 없습니다." 주1) 물론 이러한 간격이, 인간의 이성 활동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오늘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이 모든 사연들이 설명되어지고 이해가 된다 해도, 고통받는 욥에게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2) 고통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아는 것과, 그것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다가 힘을 얻었던 기억을 회상해 봅시다.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 다시 일어설 위로와 용기를 얻었나요? 고난이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어서? 대부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이 사망의 골짜기 가운데 나와 동행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에, 눈물 흘리는 나를 이해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힘을 얻은 것이 아니었나요? 고통이 찾아온 원인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말리는 상황 가운데 있는 나를 일으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인 설명은 우리에게 쓴 웃음만을 남기고 가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애타게 원하는 것이 실상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욥을 거칠게 몰아붙이시는듯한 하나님의 말씀들은 오히려 세밀한 배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욥을 정죄하시고 벌하고자 하셨다면 굳이 이토록 긴 말씀들을 늘어놓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엄위와 능력으로 “이 교만한 피조물이여. 네 분수를 알아라.”고 욥을 소멸시키시면 끝나는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욥에게 수다스러울 정도로 긴 말씀을 쏟아놓으시는 반면, 그분에 관해 잘못 말해온 세 친구들과는 전혀 상대를 하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너는 이것을 아느냐? 이것을 본 적이 있느냐? 이것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자세를 한껏 낮추시며 욥에게 이것 저것 질문하십니다. 울며 신경질 내는 다섯 살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엄마를 보신 적 있나요? 힘으로 따지자면 아이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어른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지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아 아이를 다그치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어른의 언어는 없습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치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욥을 다루시는 방법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거칠게 보이는 하나님의 언어가 사실은 가장 섬세한 자비로 욥에게 전달되는 것이지요.
주
1)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홍성사), 2장 하나님의 전능 中
2) 필립 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좋은씨앗),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