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다 (38-42:6)
하나님께서 욥에게 쏟아내시는 질문들을 다시 살펴봅시다. 질문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사자, 까마귀, 산염소, 암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매와 독수리.... 이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나 신기하게 구경할 뿐, 사람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있지요. 많은 신학자들은 이 본문에 하나님의 의도가 심겨져 있다고 주석하는데, 그것은 욥과 세 친구가 갖고 있는 견고한 신학 하나를 무너뜨리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 중심의 신학' 말입니다. 주1)
하나님은 광야를 걱정하시어 비를 주시는 분이며(38:26) 사자의 식욕을 챙겨주십니다(38:39). 그리고 배가 고파 허우적거리는 까마귀 새끼를 위해 먹이를 마련하십니다(38:41). 우리는 평소에 그것들을 생각이나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것들은 '불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가뭄이 들어 그것들이 쓰러져 죽는 모습에 우리는 '안됐네' 정도의 동정은 잠시 던질 수 있어도 사실상 관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건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냐고 삿대질하지요.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이에 관해 하나님께서 가장 탁월하게 교훈하시는 성경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요나서 4장에서 요나는 수많은 가축들과 아이들이 있는 대적 니느웨 성에 대해서 섬뜩할 만큼의 냉정함을 보이지만, 자신에게 그늘을 제공하던 박넝쿨이 말라 죽은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치를 떨며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항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증오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깊은 긍휼을 갖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물들과 관련하여 인간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릴 수 있는 종들은 개, 고양이, 소, 돼지 같은 것들입니다. 왜일까요? 그것들은 인간에게 잘 순응할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노동과 정서와 먹을 것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나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들나귀는 결코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그것만큼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물도 없습니다. 타조는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그것은 알을 낳은 후 버려두고 떠나버릴 정도로 지혜가 없지만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그 속도를 따라갈 짐승이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질문 속에는 인간이 납득할만한 답이 내려져야 한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타조에게는 왜 자식을 향한 긍휼이 없는가?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가치를 기준으로 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단순한 대답을 내리실 뿐입니다. 당신께서 타조에게 총명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황한 듯 보이는 하나님의 질문들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하나님이시기 전에 광야의 하나님이시며 사자의 하나님이시며 까마귀와 들나귀, 타조의 하나님이시다. 세상은 인간을 위해 설계되고 창조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사실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덜 사랑하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적 시야를 전환시켜줍니다. 피조물 중 하나인 인간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몇 달 동안 준비한 야외 전도집회날에 폭우가 내리자, "하나님의 뜻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한탄하는 것은 지나치게 우리 인간, 우리 교회 중심의 사고방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점에 하나님이 비를 간절히 구하는 누군가를 염려하셨을 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누군가는 인간이 아니라 길에 솟아오른 말라버리기 직전의 들풀일 수도 있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한, 올바른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 관점을 내려놓게 하시기 위해, 욥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피조물 중 하나라는 겸손한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 거친 질문들을 쏟아놓고 계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뒤이어 욥에게 두 번째 카테고리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것은 친구들과 논쟁할 때 욥이 거론했던 '세상의 부조리'에 관한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욥은 자신이 곤경에 처하자 비로소 세상에 정의가 올바르게 시행되지 않음을 새삼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24장).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인이 합당한 벌을 받지 못하는가? 그들은 죽음의 순간조차 왜 평안한가? 나는 답변을 들어야만 하겠다."
신을 향한 법적 소송까지 불사하는 욥의 호소에, 하나님은 오히려 책망을 하십니다. “너의 무죄함을 앞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려고 하느냐?” (8절, 공동번역) 라고 말입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40:8-9)
9절에서 하나님은 욥의 위험한 소송은 성립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욥에게 세상을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이라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저 악인에게 즉시 벼락을 떨어뜨릴텐데."라고 주장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네가 벼락을 다룰 줄이나 아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십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40:10-12)
하나님은 욥에게 하나님처럼 영화와 영광을 입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욥의 분노를 온 세상에 발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설령 그러한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적시 적소에', '가장 합당한(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욥은 그런 지혜도 분별력도 가지지 못한 육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처럼, 사람인 브루스가 신이 되자 세상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인간이 만든 정의의 기준으로 인간을 처벌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왔습니다. 나라를 흥왕하게 한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스러운 전쟁과 노역에 몰아넣고, 압제자를 심판한다는 혁명의 기치 아래 수많은 이들을 즉결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만든 사례들을 우리는 넘치도록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겪어온 시행착오들에 분명히 진보가 있었음을 고려하더라도- 실상 온전한 정의를 수행할 능력과 분별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간 밭을 보고 종들이 와서 "다 뽑아버릴까요?"고 물어보지만, 주인은 "가만 두라"고 제지합니다. 그 밭에 알곡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눈에 보이는 악을 다 제거해버리면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악을 제거하며 함께 뽑히는 알곡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지요. 주2)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입맛에 맞는 정의'를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통제 아래에 들어올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식과 질서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길들여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
1)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279-281
2) 김기석 「성서학당 '욥기'편 20강」, CBS 방송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