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통치와 욥의 반응 (38-42:6)
욥을 몰아붙이시던 하나님은 갑자기 또다른 피조물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입니다. 과거 한국교회가 개역한글 성경을 사용했을 때 '베헤못'은 '하마'로, '리워야단'은 '악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어마어마한 묘사를 볼 때 그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성급한 신학자는 "이것이야말로 공룡을 가리키는 것이다. 욥의 시대에 공룡이 인간과 공존했다는 증거다."고 주장합니다만, 과학적 근거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룡은 아니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생물이라는 주석도 있고, 신화적 존재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두 생명체는 인간이 보기에 몹시 두렵고 공포스러운 '괴물'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두 생명체를 어떻게 묘사하시는지 함께 봅시다.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40:15-24)
베헤못은 어마어마한 풀과 나무를 먹어치우는 생물입니다. 얼마나 거대하고 튼튼한지 홍수나 강물의 범람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베헤못에 관해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이 베헤못을 일소 다루듯이 길들일 수 있겠느냐?"
뒤이어 하나님은 가장 공포스러운 생물인 리워야단을 소개하십니다. 리워야단은 시편과 이사야에서 '공포의 상징', '바닷속 용'으로 묘사된, 고대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괴물입니다.
"욥아, 이토록 무서운 리워야단을 네가 애완동물처럼 통제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40:1-11)
거대한 베헤못과 공포스러운 리워야단, 이들은 인간에게 분명히 무시무시한 생물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호랑이는 악한 것인가요? 그렇게는 말할 수 없지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선과 악’의 개념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최고의 창조물에 한껏 매료되어 계십니다. 주1) 마치 스스로가 최고의 창조물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을 비웃듯이 말이지요.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
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그것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어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는구나
서로 이어져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
그것의 살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는구나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
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40:12-34)
하나님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보이시며, 이 두 피조물의 통제 가능성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론은? '불가능' 입니다. 이 두 생물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의 문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돈으로 가득찬 그 생물들조차 당신의 손 아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40:11)
무시무시한 리워야단과 베헤못은 아무도 길들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가장 무섭고 소름끼치는 피조물조차 창조주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지요. 주2)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단 인간이 말하는 '정의'와 '심판'의 개념은 편협하고 오류투성이입니다. 인간은 리워야단을 향해 "악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창조한 최고의 걸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저는 하나님이 선과 악의 개념을 뒤집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궁구하고 짜내는 선악의 문제, 정의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기에, 인간은 공의의 개념을 내릴 수조차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혼돈과 공포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통제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어둠과 사망, 불안과 절망이라는 존재조차 그분의 손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차마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는 '완벽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것을 믿고 신뢰하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을 완전히 부정하시려는 목적으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성은 분명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오게 해 준 도구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이성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중 우리가 결코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을 신뢰합니다." 라고 말하는 믿음 말이지요.
하나님이 쏟아내신 질문 형태의 답변들은 욥이(그리고 욥기를 읽는 우리가) 기대했던 내용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만약 하나님이 베헤못과 리워야단, 그리고 이 모든 '혼돈'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자신의 것이라 칭하시며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비록 명쾌한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 모든 현실들을 감수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욥이 "세상은 악인의 손에 있다!"라고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아니, 세상은 다 내 손에 있다."고 반박하신 것처럼, 거친듯 보이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우리에게 위안과 힘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예수와 연합된 우리는, 우리들이 결코 그분과 분리될 수 없는 능력의 사랑 안에 있음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련이 있고, 좌절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만나지만 우리는 이것이 최종적인 비극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명쾌히 설명할 수 없다 해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삶의 결과가 -우리가 흔한 간증집회에서 듣는 것처럼- 이생에서 복을 받고야 마는 멋진 결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이성적으로 이해해서가 아니지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 공세를 받은 욥의 마지막 반응 부분은 욥기의 최고 난제 중 하나입니다. 욥은 가열차게 주장했던 자신의 주장들이 쓰레기와 같은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틀렸음을 고백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1-3)
그리고 이어지는 6절의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42:6)
여기서 ‘스스로 거두어들이고’(버리다, 후회하다의 두 가지 뜻)라는 단어와 ‘티끌과 재’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크게 세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욥이 자신의 모든 행위들을 죄로 여기며 회개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죄 있다고 선포하고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합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부족한데, 하나님께서 이후 욥의 무죄함을 이미 인정하셨고 친구들에게 욥의 승리를 확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욥이 아닌 친구들의 주장이 맞았다는 결론이 나와버립니다.
둘째, 욥이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확신을 유지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에 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특히 하나님을 향한 고소-에 대해 철회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제 생각을 돌이킵니다 - 티끌과 재 위에서”)
셋째, 욥이 하나님을 만난 것 자체로 위로를 얻었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버리며 먼지와 재로 인해 위로를 받습니다.”) 여기서 먼지와 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의미합니다. 주3)
본문은 아직 논쟁중이고 어느 해석이 전적으로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욥이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가까운 해석은 두 번째라고 생각하는데, 욥은 자신의 무죄함은 여전히 확신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은 불합리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셔야만 한다는 주장은 철회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질문들로 욥은 인간 중심적인 신학을 버렸습니다. 그는 창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차원이 다른 전능자를 만나며 세상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만의 지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죄의 보응도, 훈련이나 연단도 아니었습니다. 욥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의 법칙으로 운영됨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할 수 없지만 답변이 없는(혹은 무기한 보류될 수 있는) 일들이 세상에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
우리가 이번 본문을 연구하며 빠지지 말아야 할 오류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니까 우리는 입을 닫고 살아야겠네."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결론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차디찬 이성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설득과 논리에도 완고했던 욥이 고꾸라지고 겸손을 찾은 계기는 내부의 사유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욥의 변화는 외부의 말씀,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다시말해 욥은 '아 그랬구나' 라는 이성적 깨달음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인격이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시야를 바꾸어 주셨으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더라"라는 세 친구들의 말이 욥을 변화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 앞에 씨름하고 질문하며 나의 상황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28장에서 지혜는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씀을 함께 배웠지요? 그리고 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인격이신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각의 문제 앞에서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지혜와 시야를 경험하는 것이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는 고백을 가능하게 해 줄 것입니다.
주
1)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322
2) 데이비드 앗킨슨, 「욥기 강해」(IVP), p.173
3)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