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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Oct 13. 2020

8강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가 (1)

하나님의 평가 (42:7-17)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은 앤디(팀 로빈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멋진 조연인 레드(모건 프리먼)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 역시 종신형 복역수로, 쇼생크 감옥에서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인맥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석방 심사를 받는 레드


 레드는 20년을 복역한 후 가석방 심사를 받게 되는데요, 심사관은 레드에게 질문합니다.


 “사회에 복귀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레드는 긴장한 나머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 채 말을 더듬으며 대답합니다.


 “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회에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에게 맹세코 진실입니다.”


 그러나 면담 후 심사결과지에는 ‘부적격’(Rejected) 도장이 찍힙니다.


 세월이 흘러 30년복역시점에서 레드는 다시 가석방 심사를 받습니다. 심사관은 레드에게 질문합니다.


 “사회에 복귀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레드는 10년 전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교과서를 읽듯 대답합니다.


 “네... 확신합니다. 정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사회에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에게 맹세코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심사결과지에는 부적격 도장이 찍힙니다.


 영화의 종반부가 되고 그는 많은 사건들을 겪습니다. 그리고 복역 40년째에 다시 심사관 앞에 앉게 됩니다. 레드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그들을 똑바로 쳐다봅니다.


 “당신은 교화되었습니까?”


 “교화라구요? 교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 사회로 돌아갈 준비 말입니다.”


 “나도 알아 젊은이, 하지만 그건 정치인들이 자네같은 젊은이에게 정장에 타이를 매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주려고 만든 말이지. 매일 후회를 하고 살았지. 이 자리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예전을 돌아보면 젊고 멍청한 젊은놈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지. 그에게 정신차리라고 인도하고 싶어. 지금의 현실을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 없지. 젊은 바보는 오래전 사라졌고 백발의 늙은이만 남았으니까. 이대로 사는 수 밖에. 교화되었냐고? 그건 다 헛소리야. 그러니까 자네는 어서 부적격 도정이나 찍고 내 시간 그만 뺏어. 솔직히 말하자면 난 더이상 상관 안해.”


 놀랍게도 심사 후 결과지에는 ‘가석방 승인’(Approved) 도장이 찍힙니다. 가석방만을 염두에 두고 정답지를 외우듯한 답변이 아닌, 결과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진심을 거칠게 쏟아낸 것이 도리어 심사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감옥에서 수많은 세월을 통과한 레드 자신이 진실한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의 솔직함이 묻혀져버린 교리나 전통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쓸모없는 제물(이사야1:10)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자세를 바라실까요? 마지막 장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드디어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욥기를 여기까지 함께 따라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 그대로 결말, 에필로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세 친구들(대표로 엘리바스)에게로 눈길을 돌리십니다. 그 시기는 언제인가요? 7절 상반절을 살펴봅시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42:7上)


 하나님은 욥에게 모든 말씀을 마치신 후에 비로소 엘리바스와 친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욥에게처럼 교훈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42:7下)


 하나님은 단순한 말씀으로 그들을 정죄하실 따름이었습니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엄위와 섭리에 대해 무수한 말을 쏟아놓으며 그분을 변호했지만, 하나님은 ‘욥이 나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에게 진노한다.’고 선언해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힐 방법으로 엘리바스에게 아래와 같이 지시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42:8)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욥을 통한 중보를 명령하십니다. 즉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지 않으시고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명령이 내려진 시점이 중요합니다. 현재 욥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회복시키시기 전에(즉, 욥이 여전히 잿더미 가운데 있을 때) 세 친구들로 하여금 욥에게 중보를 부탁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엘리바스가 주장하던 것을 기억해 봅시다. 그는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라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확신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욥을 통해 그들의 죄를 속하게 하심으로써 욥의 승리를 확정해 주셨습니다. 욥은 스스로의 무죄를 변호하려 애써왔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리로 내려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변호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친구들은 틀렸습니다. 욥이 옳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하시고 친구들을 정죄하신 기준은 무엇일까요? 본문 직전까지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다 갑자기 욥이 옳고 친구들이 틀리다라고 말씀하시니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사실 욥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과응보'이지요. 그러나 친구들은 부조리 앞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신학으로 세상을 끼워맞추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틀릴 리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결론은 네가 죄인이다."라고 손쉽게 판단내렸습니다. 반면, 욥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배워온 것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대체 이게 뭡니까.”라며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교리에 상황을 끼워맞추려던 친구들이 아닌, 이해할 수 없다며 회의하는 욥의 손을 들어주신 것이지요.   주1)


부조리에 대한 두 가지의 태도


 하경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을 향한 말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해서(about) 이야기했을 뿐이다. 욥의 말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시종일관 도발적이고 불경하게 느껴지는 과격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침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욥이 보여준 태도는 불신앙이 아니라 경건의 한 모습이다. ”  주2)


 오늘 하나님의 이 판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바로 올바른 믿음과 신앙의 자세에 관한 것인데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진실함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표현되는 형태가 도발적이고 비신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뇌하고 분투하는 인간의 마음, 그 중심을 받으시고 인정하십니다.


 반면 단편적인 교리로 모범적인 정답 속에 안주한 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중심은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그 사람 본인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욥기는 42장에 걸쳐서 이 주제를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김기석 「성서학당 '욥기'편 21강」, CBS 방송분 中

2)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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