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의 결말에 만족하시나요? (42:7-17)
이제 욥기는 마무리를 준비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42:10-12)
하나님은 욥을 회복시키실 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습니다. 양 1만4천, 약대 6천, 소 1천, 암나귀 1천... 모두 이전보다 두 배의 숫자입니다. 그리고 욥의 자녀와 여생에 대해서도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42:13-17)
욥은 이후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다고 합니다. 특히 딸들은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전국 제일의 미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욥은 이 딸들을 아들들만큼 아꼈습니다. 그리고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본 후 기한이 차서 죽었다고 하며 욥기는 끝을 맺습니다.
이제 모든 긴장은 끝난 것 같습니다. 욥기도 마무리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은 이 결말이 마음에 드시나요? 하나님께서 욥을 멋지게 회복시켜주셨는데, 욥은 고난받은 것에 대한 온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결말이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사실 그 어떤 물리적 보상이 욥의 고통, 그리고 잃어버린 10명의 자녀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엘리 위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던진 미끼를 물지 말았어야 했다.” 주1) 라고 말이지요.
욥의 결말, 즉 욥이 받은 보상에 대한 것은 욥기의 주요 쟁점입니다.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욥기의 마무리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우리가 욥기를 어떤 관점으로 읽어왔느냐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주제 역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의 모든 보상을 흡족하게 누리고 그것으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상식적으로 난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새롭게 얻은 자녀들이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러워도 잃어버린 자녀들에 대한 상실감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욥기의 결말은 어떤 측면에서 잔인한 것입니다. 또한 욥기는 하나님이 둘러주신 울타리가 인간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선언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으로 인해 욥이 만족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본문에 욥의 피부병이 회복되었음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욥이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내세의 축복에 대한 ‘맛보기’로 인식했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신 것들을 다시 살펴봅시다. 재물들은 하나님께서 모두 갑절로 되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새로 주신 자녀들의 숫자는 여전히 열 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1장에서 죽어버린 자녀들은 현재 천국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 역시 두 배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주장이지요. 욥은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현세의 상황들을 한 순간에 회복시켜주실 수 있음을 확신하고, 부활의 신앙을 바라보며 더 나은 내세를 소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럴듯하지만 고대의 신학적 배경에서 ‘부활’이라는 개념이 과연 그정도로 발전되었는지는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셋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답변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했음과 동시에, 자신이 통과한 사망의 골짜기는 마음 한 켠의 아물수 없는 상처로 안고 살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자식들에 대한 것도 ‘이것이 인생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넷째로, 욥은 불가해의 하나님 앞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으나 질문하는 것은 중단하고 일상에서 누리는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주2)
이 주장들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기존 번영신학이 욥기를 억지스레 해피엔딩으로 끼워맞추는 시도를 한 나머지, 오히려 세 친구들의 신학을 대변해버리는 폐단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결말 해석시 분명히 경계해야 합니다.
참고로 「신학의 렌즈로 본 구약 개관」(새물결플러스)에서 저자는, 욥기가 포로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에밀 파켄하임의 글을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욥에게 있어서 자녀들은 회복되었다. 회복된 자녀는 그가 잃었던 동일한 자녀들이 아니었다. 라헬의 자식은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한 자식이 아니었다.” 주3)
신약성경에도 욥기가 소개됩니다. 바로 야고보 사도에 의해서인데요, 야고보 사도는 시련 가운데 처한 교회를 향해 아래와 같은 격려를 전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11)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쉬운 길이 아닐 것입니다. 욥기의 신학은 ‘신명기적인 복’(순종-축복, 불순종-저주)과 관점을 달리 합니다. 신약성경은 이보다 한 발 더 나가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2)는 십자가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증거한 것처럼 우리는 안심하고 인내하며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다면 우리는 확신가운데 하늘가는 밝은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
1) 필립 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좋은씨앗), p.293
2)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302 와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337-338에서 제시한 의견들을 참고함
3) 브루스 C.버치 外, 「신학의 렌즈로 본 구약개관 」(새물결플러스), p.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