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위로의 신학 (4-27장)
우리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말들을 읽어갈수록 무릎을 치게 만드는 탁월한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토록 우리를 감동시키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5:9)
사방이 우겨싸임 당한 사람에게 이 말씀은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엘리바스가 욥에게 회개를 권하며 했던 말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7)
본문은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욥기의 요절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빌닷이 욥에게 회개를 권하며 했던 말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21)
하나님 앞에서 내가 행할 바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발이 욥에게 회개를 권하며 했던 말입니다.
이 구절들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은혜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욥기 본문의 문맥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잘못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큐티나 통독 가운데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개인적인 은혜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요절 하나로도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분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위의 말씀들이 목회적 위로에 활용되거나, 공적인 설교에 사용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오류와 똑같이, 성경의 의도를 무시한 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권면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된 위로를 하는 친구들을 비판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대답을 듣겠다고 결심합니다. 욥이 이런 태도로 나올수록 친구들은 그를 고집스럽다고 여기고 그를 위로하려던 말들도 격해지기 시작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집니다.
이제 하나님이 두렵지 않고,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어졌는가?
(15:4, 쉬운성경)
엘리바스는 "욥, 드디어 네가 신앙을 버린것인가?"라며 정죄합니다.
어째서 우리를 짐승 취급하고, 어리석게 보는 건가?
화가 나서 제 몸을 찢는다고 땅이 황무지가 되며 바위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겠는가?
(18:3,4, 쉬운성경)
빌닷은 욥을 향하여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미련한 자"라고 칭합니다. 욥을 정신차리게 하려고 쓴 표현인 것 같지만 그는 분명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20:5-7)
소발은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며 그의 운명이 '똥'과 같은 멸망의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의 저주나 다름없습니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22:5-9)
처음에는 완곡하게 말했던 엘리바스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그를 정죄합니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실제처럼 이야기하며 "네가 약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 꼴이 난거지. 틀림없어."라고 일갈합니다.
성경에는 세 친구들이 무엇을 위해 욥을 찾아왔다고 나와있나요?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들으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들이 위로자가 맞나요? 위로는커녕 참혹한 처지가 된 욥을 확인사살하기 위해 달려드는 하이에나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요? 욥도 이들을 향해 단호한 평가를 내립니다. 아래 말씀들을 읽어 봅시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19:2-3)
욥은 친구들의 위로가 오히려 자기를 잔해하는 '학대'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면 건넬수록 욥의 마음은 찢겨갑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13:4)
무슨 말인가요? "너희는 다 돌팔이 의사야!"라는 의미입니다. 도와준답시고 찾아왔지만 그들은 치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13:5)
친구들이 욥에게 회개를 제안했다면, 욥은 친구들에게 "입을 닫고 있는 게 나를 도와주는거다"라는 제안을 합니다. 친구들이 말을 하지 않을수록 욥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친구들이 욥을 향해 시도한 위로는 처절한 실패로 끝이 난 것입니다.
재물을 잃고, 자녀들이 몰살당하고, 온 몸에 피부병이 든 채로 잿더미에 앉아 있는 이에게 이런 말들을 쏟아낸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입니다. 성경은 왜 이런 친구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쓸모없는 의원', 즉 '돌팔이 의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위로의 명목하에 그러한 잔인함을 쏟아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급하게 정죄하고 성급하게 판단합니다. 자신은 지지도 못하는 교리의 짐을 상대방에게 지웁니다(누가복음11:46). 상대방이 겪는 고난의 깊이와 복잡함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내가 아는 하나님이 전부인 양, 쉽게 '정답'을 던집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수긍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답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음없는 자'로 또 다른 정죄를 합니다.
욥기는 '위로하는 자'가 얼마든지 '잔해하는 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에 대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고난을 해석함에 대해 쉽게 범할 수 있는 무례와 오류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다가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쉽게 어떤 말을 내뱉어서는 안되고, 앞서 그의 심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교리와 성경구절이 모두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상황에 섣불리 적용하면 틀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잠언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 25:11)
4강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틀림없는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욥을 돕기는커녕, 그를 산산조각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단순히 선포하는 것과,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식을 사람의 필요에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 역시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욥은 그들이 말하는 바, 조언의 무가치함과 부적절함으로 인해 그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주1)
친구들의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정연한 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그 원리에 예외가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친구들은, 욥의 상황을 그들이 익히 배워온 원리 속에 우겨 넣으려 한 것이었지요. 그 결과로 친구들이 얻은 것은 '돌팔이 의사'라는 욥의 차가운 평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친구들이 욥기 전체를 통해 가장 잘 한 일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칠일간, 욥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그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준 행위입니다. 그들이 친구로서 아무말 없이 함께 있어주었기에 욥도 3장의 비탄을 마음놓고 쏟아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2:11-13)
주
1) 데이비드 앗킨슨, 「욥기 강해」(IVP),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