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오류 (4-27장)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심은대로 거둔다'(갈라디아서6:7), '악인의 결과는 비참하다'(시편 1편)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와같은 말씀들을 욥의 상황에 적용했는데요, 아래와 같이 역(逆) 관계도 성립을 할까요?
ㆍ죄 → 고난 (말씀)
ㆍ고난 → 죄 (친구들의 주장) 주1)
분명 친구들의 주장은 신명기나 선지서, 시편 곳곳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현재 상황 자체를, 하나님께서 공의를 시행하신다는 증거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의외로 친구들의 사고방식과 같이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누군가가 몸을 다치고, 자녀가 잘못되고, 사기를 당하고... 이런 불행들을 연이어 당하면 우리는 위로를 전하면서도 은연중에 '왜 이렇게 저 사람에게 고난이 계속 몰리지? 하나님이 무슨 신호를 주시는건가?'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도와준답시고 찾아가서 "혹시 자매님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죄가 없는지 한 번 기도해 보세요." 라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권면의 한마디가 듣는 이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는 세상에 오류란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명쾌한 해석과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단편적으로 발췌하여 욥의 특정 상황에 끼워맞춰 버렸습니다. 친구들에게는 그렇게라도 정답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천상회의를 본 우리가 익히 알듯이- 틀렸습니다.
친구들이 범한 오류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요? 얄팍한 지식과 신앙경험으로 누군가의 상황을 섣불리 해석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세상의 통치 원리가 분명히 있지만, 그것들 역시 충분한 시간이 지나보아야(어떤 사건은 천국에 가서 물어보아야만!) 해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를 지으면 징계를 당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사실 자체로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친구들은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자 몸서리치며 "완전하신 하나님께 이 무슨 교만한 행위란 말인가, 당장 그만두라"고 충고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이야말로 의와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 아닙니까? 그분 앞에서 자신의 옳음을 내세우는 것은 교만함이요, 신성모독적인 일임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로마서의 말씀도 이를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3)
하지만 이런 보편적 진리를 특수한 상황에 마구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를 살펴봅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나는 악한 자들의 길을 따르지 않고 내 자신을 보살폈습니다.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신 길로만 갔고, 곁길로 간 적이 없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지금 주님을 부르니 나의 부르짖음에 대답해 주소서. 내게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소서.
(시편 17:4-6, 쉬운성경)
원수들의 위협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행해온 일들을 아룁니다. '내가 이렇게 깨끗하게 살아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 왔습니다,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 라고 말이지요. 다윗은 이를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교만한가요? 이 기도에서 그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운 삶을 기도로 올리며 하나님과 늘 동행해 왔음을 표현한 것이고, 지금 이 순간도 그렇게 살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뿐만이 아닙니다. 유다 회복기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의 기도를 살펴봅시다. 그는 백성들의 흐트러진 예배와 삶을 개혁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때로는 과격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성소를 더럽히며, 이방인과 통혼하는 모습들을 그냥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경고와 행정집행과 때로는 폭력까지 사용하며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성결로 이끌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이 일에 관하여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행한 모든 좋은 일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느헤미야 13:14, 쉬운성경)
이러한 개혁의 행위들을 시행하며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오 하나님, 나의 행위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느헤미야의 이러한 행위는 교만함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결단이자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다윗이나 느헤미야 뿐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위인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올려드렸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백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행위'는 단편적인 교리 한 줄로 평가할 일이 아닙니다. 욥 역시 하나님 앞에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견딜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의 일환으로 사용된 것이지요. 이러한 욥의 심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친구들의 말들은 가볍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하는 호소에 다른 관점에서도 제동을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인데요, 하나님은 만물의 소유주이시며 부족할 것이 없는 분이시기에 인간이 발버둥치는 온전함은 그분께 어떤 보탬도 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22:1-3)
엘리바스는, "나는 깨끗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주장이 위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아무런 득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아쉬울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인원을 채워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돌들을 통하여서도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꼬박꼬박 해야 하나님께서 생계(?)를 이어가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를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무익할 뿐이라는 것이 엘리바스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이런 예배와 헌금과 의로운 삶들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필요없는 하나님께서 예배로 나오는 우리의 행위를 기쁘게 받으시고, 심지어 그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행한 작은 선행이 하나님께는 자랑거리가 되고, 말씀을 통한 작은 변화가 하나님을 춤추시게 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죄많은 여인의 예배를 예수님께서는 깊이 열납하셨고,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는 헌신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작은 몸부림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사소한 행위에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말씀을 위에서 드렸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지 못할 때에만 고난이 찾아왔나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상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며 호위호식하는 자들이 평강을 누리고 죽을때까지 고통없이 눈을 감는 모습들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으로 살아온 사람이 억울한 재난을 겪는 광경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비단 이 문제뿐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얼굴을 가리우시는 하나님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정반대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적지 않게 접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에 대한 성급한 해석은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친구들은 주권적이고 선하신 하나님을 인과응보라는 하나의 원리로 깔끔히 정리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난을 겪는 욥을 향해 "네 실수에 책임을 져라"고 주장합니다. 친구들의 하나님은 입출력이 확실한, 하나의 프로그램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나 욥의 하나님은 지금 그런 단순한 원리를 뛰어 넘고 계십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며 그분께 대들었습니다.
"왜 나를 살려두시나요?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친구들은 욥의 이런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행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3강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기도도 받으시는 분입니다. 때로 신성모독적인 표현이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진실함 가운데 토해진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물론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대해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경외하는 자세에 집착한 나머지 우리의 진심을 그분 앞에서 억눌러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친구들이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제안한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 그러면 평안이 임하리라."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과업을 모두 욥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주2)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편에서만 노력해야 하는 일인가요? 지금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인가요? 사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멸망당해 마땅한 우리의 인생을 영광의 길로 옮겨놓으셨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3-6)
친구들이 놓친 것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와 '자비'입니다. 친구들의 말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 우리의 죄악마저도 덮으실 수 있는 것이 당신의 은혜입니다. 친구들은 그 점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습니다.
주
1) 브루스 C.버치 外, 「신학의 렌즈로 본 구약개관 」(새물결플러스) p.571
2) 데이비드 앗킨슨, 「욥기 강해」(IVP),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