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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Aug 21. 2020

4강 팩트는 항상 유용한가 (1)

엘리바스, 빌닷, 소발 (4-27장)

 4강을 들어가기 전에 아래의 카톡 대화를 한 번 읽어보도록 합시다.    



 건우는 승호를 위로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승호의 반응은 어떤가요? 위로를 받기는커녕 대화방을 나가버렸죠? 건우의 위로방식에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건우는 말씀과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호를 설득했는데 말이지요. 오늘은 욥의 세 친구들의 대화를 살펴보며 그들의 말들에 대해 연구해 보려 합니다. 친구들은 카톡 대화에서 나온 건우의 말 이상으로 욥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들이 욥을 찾아온 것이 '위로'의 목적이었음에도 말이지요.




익숙한 간증들


 혹시 교회 부흥회나 집회 때 간증을 들어보신 분이 있나요? 저의 경우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간증집회에 초청받아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웃음과 눈물과 감동을 동반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토리는 큰 틀에서 일치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제가 들은 간증들의 경우 적지 않은 내용이 아래와 같은 스토리였습니다.


1.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을 살았었다. (혹은 교회는 다녀도 나일론 신자였다)


2. 커다란 고난을 만났다.  


3. 주변의 권유로 교회를 찾고 신앙생활을 다시 하게 된다.


4.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한다.


5. 그러고 나서 내 삶을 돌아보니 그 고난은 나를 정신차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더라.

 

인상적인 간증들


 이런 간증들을 통해 저는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귀한 간증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이런 스토리 라인의 간증들이 갖고 있는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하나님께 매 맞고 돌아온 이야기'가 한국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그로인해, 듣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거나 제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요즘 내 삶이 기도도 안하고 영 엉망이야. 곧 하나님이 한 대 치실 것 같아.'


'아아, 내 아들이 이번에 대학 떨어지면 어떡하지. 아들을 위해 무언가 서원을 드려야 하나.'


'내가 왜 이런 사건을 당했을까, 내가 뭔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게 틀림없어. 그걸 알려달라고 기도해야겠다'


 물론 위와같은 생각들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샤머니즘적 무속신앙과 다를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 한국교회의 간증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건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왜곡된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것이지요. 오늘 등장하는 욥의 세 친구들은 이와같이 맞는 듯하나 뒤틀린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2:11-13)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무엇을 위해 모였다고 나와 있나요?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 각자의 거주지인 데만, 수아, 나아마라는 지명은 어디라고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욥이 살고 있는 우스 땅으로부터 먼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시 고대 교통수단을 고려했을 때, 그들은 분명 어려운 걸음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이 욥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했던 행동들에는 진심과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자신들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습니다. 이는 격한 아픔을 표현할 때 하는 행동들입니다. 무엇보다 친구들은 밤낮 칠일 동안을 욥과 함께 있어 주었고, 가타부타 한 마디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세 친구


 이들의 행동들을 보며 무엇을 느끼시나요? 그들의 모습에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을 힘들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욥의 도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진정한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욥을 향해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고 그의 상처를 덧나게 하며, 심지어 모욕적인 말들로 잔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진정한 친구가 진정한 동기를 가지고 진정한 위로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무서운 모습으로 돌변해버린다는 사실이 믿기시나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욥의 탄식에 대한 반응


 친구들을 자극했던 욥의 말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살펴봅시다.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3장을 함께 보았습니다. 3장은 욥의 탄식으로 가득차 있는데요, 욥이 내뱉은 말들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다 필요없다. 지금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이게 내 유일한 소원이다."


 조심스럽지만 욥의 탄식을 조금 더 확장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기도를 듣기나 하세요? 아닌 것 같아요."


 만약 교회 소그룹이나 개인과 교제할 때,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저런 말은 좀 심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불신앙스러운 비탄이 길어질수록 후자의 생각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하나님께 너무 심하게 말하는 저 친구를 좀 바로잡아줘야겠다.'


 친구들도 욥의 말들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아마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욥이라는 사람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들도 놀랐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모범중의 모범인 욥이 죽고싶다는 말을 하다니!'


 그것을 바로잡아주려 하다가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친구들의 권면은 상처난 욥을 더욱 괴롭히고, 욥의 비탄은 친구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듭니다. 욥이 친구들과 논쟁하며 쏟아놓은 말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7:1,15)


 욥은 절망의 끝을 향해 추락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희망이란 없다, 내 인생은 무덤 외에 종착지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내 인생은 끝났다....


 친구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믿는 사람이 왜이렇게 부정적인 이야기만 쏟아놓는단 말인가, 적당히 좀 하지.'


 다음 욥의 말을 살펴봅시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7:11)


 무슨 말인가요? 욥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대로 순응하며 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부당하다, 나는 몹시 아프고 억울하다, 이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 책임이다, 아니라면 설명을 좀 해 보십시오....


 이런 말을 들은 친구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대놓고 불평까지 하는군. 큰일이네 큰일이야. 욥은 너무 힘겨운 나머지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욥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23:11-12)


 욥은 자신있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의롭게 살아왔습니다. 나는 이토록 참혹한 재앙을 당할만큼 잘못 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상황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뿐 아니라 곳곳에서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런 욥의 말에 뒷목을 잡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주장하다니,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망정 큰일날 소리를!'


 그러나 이보다 더 쇼킹한 욥의 말들이 이어집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3)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3:15)


 욥은 헛소리인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놀라운 결단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꼭 만날거야. 하나님은 이 상황에 대해 내게 설명해주셔야 해.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분께 할 말은 하고야 말거야."


 '이 무슨 신성모독이란 말인가! 욥은 이제 정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친구들을 자극한 욥의 말들


 친구들은 경악하며 더욱 거칠게 욥을 몰아붙이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우리는 보통 교회 안에서 '희망'과 '소망', '겸손'과 '순종', '경외'와 '예배' 같은 내용이 담긴 말들이 건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절망’, ‘의를 내세움’, '이의제기', '반항'의 느낌이 있는 언어는 터부시하고 신앙인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한 번쯤 성찰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애통', '괴로움', '눈물', '원망' ...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 말할 자리, 앉아있을 자리가 있나요?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발걸음한 사람에게 애가(哀歌)를 부를 수 있는 틈바구니를 열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의 말을 듣고 그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장황하고 길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본문들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대신 수많은 말들의 핵심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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