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돌 (3:1-26)
아래 표를 한 번 볼까요? 욥기의 구성을 세 부분으로 나눠보았습니다.
1강에서 욥기의 구성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드렸지만, 욥기는 1,2장과 마지막 42장만 있으면 아래와 같이 참 깔끔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욥이라는 의로운 사람이 살았는데 하나님이 그의 의로움을 시험해보시려고 고난을 내리셨다. 그러나 욥은 처절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경배했다. 시험을 끝내신 하나님은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베풀어주셨고 욥은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욥기는 3장~41장이 있기 때문에 종교를 뛰어넘은 위대한 문학작품이 되었습니다. 뛰어난 위인의 성공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뛰어났어. 너희도 열심히 따라해봐' 라고 말이지요. (시중에 나온 자기계발 서적들과 성공 에세이도 다 이런식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글을 읽을 때 감동과 도전은 받을지 몰라도 결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책을 덮고 이틀이 지나면 스스로의 모습에 절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이 산산조각나버린 한 사람의 애환과 토로, 한스러움, 절망, 신성모독에 가까운 기도가 그 내용을 채우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남직한 사건과 누구의 머릿속에나 돌아다닐 수 있는 생각들이 욥기에서 다루어집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섭고도 냉정한 현실과의 정직한 대면' 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것은 이런 내용이겠지요.
어쨌든 욥은 현재 미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와 있습니다.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단지 욥이 재물과 가족을 잃고 자신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1장에서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본을 보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경건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복들이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면서 받은 선물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악인에게는 반드시 몰락과 패망이 있을 것임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욥이 이러한 신명기적 신학(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징계를 받음)을 신봉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욥은 아래와 같은 말씀들을 신뢰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1: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편37:25)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잠언12:21)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13:9)
그러나 지금 욥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말씀들입니다. 그가 의지하며 살았던 신학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약속의 말씀들이 무서운 실존과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주1) 욥이 갖고 있던 신학으로는 현재 상황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자니 자신이 믿는 바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붙들려니 부정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 눈앞에 떡 하니 서 있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복을 받았던 욥의 절망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그림을 잠깐 주목해 볼까요? 1번부터 4번까지, 각 상황에 따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동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1번이나 2번의 상황에서는 절제되고 딱딱한 언어가 사용되겠지요. 3번의 경우 보다 이완된 표현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4번은 어떨까요? 대화 자체가 몹시 단순해집니다. 문장들도 길지 않겠지요. '기분 좋아', '싫어', '이거 사줘', '사랑해'와 같은 말들이 오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에 사용되는 언어들은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졸업식 송사나 보고처럼 딱딱한 언어를, 때로는 친구나 어린아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아래 상황들을 떠올려보고 내가 위의 1~4번의 언어 중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한 번 적어봅시다. (아, 물론 '1~2번 사이'와 같은 답도 좋습니다)
1. 대표기도시 ( )
2. 성령충만할 때 ( )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 ( )
4.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 )
5.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 )
어떻게 답을 하셨나요? 각자의 신앙적 기질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답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과 관계가 멀다고 느낄수록 우리는 딱딱한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많은 미사여구가 동원되며 점잖은 표현들이 기도 내용을 채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우리 기도의 언어는 보다 단순해지고 직설적이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저서 「응답하는 기도」(IVP)에서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추상화는 기도의 적이다. 아름다운 개념들은 기도의 적이다. 세련된 사고는 기도의 적이다. 바위에 발가락이 부딪히고, 폭풍우에 흠뻑 젖고, 원수에게서 뺨을 맞을 때 진정한 기도가 시작된다.” 주2)
욥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여과없이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의 언어는 포장될 수 없습니다.
"그냥 죽여주십시오."
"나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인생입니까? 차라리 내가 안 태어나는 게 더 나았습니다."
믿음의 위인이었던 욥은 우리가 당황스러울 정도의 말들을 하나님께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우리가 보기에 아슬아슬한 경계를 드나들지만 그의 기도에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경외함을 그치는 말들은 사용되지 않습니다. 주3) 그는 1,2장의 믿음의 고백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욥은 자신이 내뱉을 수 있는 모든 심경의 표현들을 그분께 토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솔직함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표현까지 하나님께 사용해도 될까?', '하나님께 원망하듯이 기도를 하다니. 내 신앙도 갈 데까지 갔구나' 라는 생각들이 우리의 기도를 주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그러한 기도들도, 아니 그러한 기도들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솔직함들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 생생한 고백을 기다리십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쏟아놓기를 원하십니다. 욥기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말도 다 할 수 있다는 대담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4)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반응을 다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거침없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토해내었습니다.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시편13:1, 공동번역)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박국 1:2-4, 공동번역)
내가 던진 질문에 무슨 말로 대답하실지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 기다려보리라.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보리라.
(하박국 2:1, 공동번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문제 가운데 초청하기는커녕, 문제 밖으로 밀어내고 대화의 창구를 닫아버리는 행위를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주5)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스바냐 1:12)
여호와의 말씀이다. "오너라, 우리 서로 이야기해 보자. 너희 죄가 심하게 얼룩졌을지라도 눈처럼 깨끗해질 것이며, 너희 죄가 진홍색처럼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희어질 것이다."
(이사야 1:18, 쉬운성경)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나요? 아마 그 어떤 장애물들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한테 화내봐야 소용없어. 네 힘만 낭비야. 어떤 응답도 들을 수 없을 거야. 다른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봐." 라는 은밀한 속삭임일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욥과 선지자들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솔직한 언어로 감정을 쏟아놓는 것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깊은 애통을 표현한 욥의 모습을 보며, 고통의 무게는 믿음의 위인이라 해서 너끈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 자체는 불신앙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솔직한 마음의 중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거친 언어도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1) 데이비드 앗킨슨, 「욥기 강해」(IVP) p.44
2) 유진 피터슨, 「응답하는 기도」(IVP) p.41
3)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63
4), 5) 필립 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좋은씨앗)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