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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by 바닐라라떼 Aug 14. 2020

3강 신자의 절망은 바람직하지 못한가 (1)

절망에 관하여 (3:1-26)

헤아려 본 슬픔


 C.S.루이스(Lewis)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시인,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과 슬픔에 관해 조금 독특하게 쓴 책이 있습니다. 「헤아려 본 슬픔」은 그가 아내를 잃은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독백 형식으로 써내려간 일기입니다. 이 책은 N.W.Clerk(클러크)라는 가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읽다 보면 ‘정말 C.S.루이스가 쓴 책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인데요, 그만큼 이 책은 한계를 넘나드는 비탄과 고뇌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진정 ‘슬퍼하는 자’로서 솔직함이 드러나기에, 공감을 주는 책입니다. 그 내용 중 몇 구절만 발췌해 보았습니다.


헤아려 본 슬픔


 (내 상태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그만둘지도 모르는 위험에 빠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짜 위험이란, 그분에 대해 이처럼 끔찍한 사실들을 믿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결론은 "그러니 하나님이란 결국 없는 거야"가 아니라,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인 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인 것이다.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H(※루이스의 아내)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평화롭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 걸까? ...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일관성 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고 소망할 때마다 목이 메는 것은 H와 내가 드렸던 기도와 우리가 가졌던 헛된 소망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부질없는 바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잘못된 진단이나 엑스레이의 사진을 통하여, 혹은 이상하게도 나아지던 상태, 거의 기적과도 같았던 일시적인 회복 등등을 통하여 우리가 믿게 되었던 희망, 심지어는 희망하도록 강제되었던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는 '동산의 길을 걸어 올라갔다.'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운 듯 보일 때마다 실은 다음 번 고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생전 치과에도 안 가 보았단 말인가?


 주여, 이것이 당신의 진짜 조건입니까? 제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그녀를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괘념치 않을 때에만 H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주여,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여 주소서. 제가 어린아이들에게 "지금은 사탕을 못 먹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자라서 정말로 사탕을 원하지 않을 때쯤이면 실컷 먹어도 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주1)


 어떠신가요? 작가와 학자로서 C.S 루이스의 영감이 빛나면서도 깊은 비탄과 토로가 내뱉어지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우리 중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이와 비슷한 기도를 드려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욥기 3장에서도 이와같은 깊은 탄식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재앙을 당한 욥은 믿음의 고백을 한 이후에 어떤 말들을 뱉어내고 있을까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무게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3:1-26)


 욥기 3장을 읽다보면 답답한 마음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욥의 심정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가 토해내는 말들이 몹시 어둡고 우울하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무어라고 말하나요? 3장의 긴 긴 토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왜 그 날이 멀쩡하게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살아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죽고 싶다. 빨리 내 생명을 하나님께서 거둬가셔서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 그러면 얼마나 기쁠까? 내 영혼은 비로소 쉼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욥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욥은, 이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이 저주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빨리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고 쉴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욥의 심정을 이해하며 3장을 다시 한 번 곱씹어 읽어보면 이것이 얼마나 공감되는 표현들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왜요? 2장 6절에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2:6)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지만,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처참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욥은 살아서 이 모든 상실의 슬픔과 자신을 휘감는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제한이 오히려 욥의 괴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명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2) 


 우리 삶에서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화상을 당해 온 몸이 흉칙하게 타버리거나,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통증을 경험하는 투병 등... 이처럼 끔찍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욥의 경우도 그러한 것이지요.


 하지만 욥의 토로는 우리에게 의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1~2장에서 어떤 시련 앞에서도 불굴의 신앙을 고백했던 모범적인 욥을 보지 않았나요? 그리고 '어떻게하면 욥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도전도 받지 않았나요? 그런데 지금 욥의 모습은 그때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연민으로 가득찬 자포자기의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죽기를 소망하는 절망의 말들을 내뱉습니다. 이런 욥의 모습이 -그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한다 해도- 조금 혼란스럽게 다가오지 않나요? 저도 욥기를 처음 읽을 때는 3장을 접하며 약간의 당황스러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믿음의 거장이 저렇게 절망의 말들을 마구 내뱉어도 되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자(信者)가 절망하는 것은 수치스럽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까요? 이런 사고방식은 은근히 오래도록 교회 안에 퍼져왔습니다. 기독교인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불경하다는 것 말이지요.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된 사람은 아래와 같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렇게 절망만 하다니, 나는 왜 이럴까?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



신자의 절망은 부끄러운 것일까?


 성도간에 교제를 할 때도 희망과 격려의 말들은 권장되는 반면, 부정적이고 비신앙적 말들은 그것을 내뱉는 순간 '나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오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는 그를 올바르게 교정해주어야 한다는 부담도 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절망과 좌절, 애통과같은 내용이 얼마든지 신앙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시편입니다. 시편은 사망의 골짜기 가운데 울부짖는 시인의 두려움과 슬픔이(그리고 저주가) 여과없이 쏟아나오는 성경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언어는 듣기 좋지요.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놓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에 희망, 격려와 전진만이 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창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찬양에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면 가슴이 미어지는 애가(哀歌)는 어디에서 부를 수 있을까요? 이것이 비단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부르는 믿음의 선구자들 역시 수많은 절망과 탄식에 시달렸습니다. 앞서 C.S.루이스의 글을 보셨지요?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거장들이 경험한 좌절과 슬픔을 우리는 그들의 전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된 것 이면에는 얼마나 더 많이 있을까요!)


 인간적 절망은 고통의 무게에 따라 얼마든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욥아, 너는 왜 인내와 믿음이 없이 그토록 방황했느냐"라는 식의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1) C.S.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홍성사) 단락 순서대로 p.23, p.46, p.48-49, p.51-52, p.68-69, p.97

2)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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