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Aug 06. 2020

2강 무죄한 고난은 존재하는가 (1)

욥이라는 사람과 천상회의 (1:1-2:10)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시청자와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초반에 강렬한 사건으로 임팩트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주인공과 가족이 끔찍한 범죄에 휘말리게 된다던지, 빚 보증 선 친구가 파산하여 도망가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감상하는 우리들이야 흥미진진한 전개를 기대하게 되지만 스토리 속 당사자는 어떤 마음일지 쉽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평소에 예상치도 못하던 재앙을 만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 또한 이러한 이러한 갑작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 살 수록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고, '어느날 갑자기' 사기를 당하며, '어느날 갑자기' 암 선고를 받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우리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당할 때 당황하고 분노하게 되지만, 이런 일들이 삶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는 정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어느날 갑자기'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느날 갑자기'는 무작위로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집니다. '어느날 갑자기'는 세상에서 선(善)의 통치를 믿는 사람들의 순진한 희망을 박살내 버립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지혜로운 태도는 '어느날 갑자기'가 자신을 비켜가기를 기대하기보다, 그것을 대면하게 될 날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일들은 내게 많은 질문들을 던질 것이고, 나로 하여금 그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 등장하는, 땅 위에서 가장 의롭고 충성된 욥에게 벌어진 일들처럼 말입니다.






욥이라는 사람


 많이 기다리셨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1:1-5)



 자, 본문이 욥에 대해 어떤 묘사를 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이 사는 곳은 어디인가요? '우스'라는 땅입니다. 이는 1강에서 설명드렸듯, 에돔 지역의 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욥의 자녀들은 몇 명이 있나요? 아들이 일곱, 딸이 셋입니다. 여기서 아들과 딸의 숫자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욥기의 저자가 욥을 묘사하는 것이 상당히 의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완전수'를 의미하는 숫자가 여러개 있습니다. 어떤 숫자인가요? 네 맞습니다. 3이 있구요, 7도 완전수입니다. 그리고 10도 완전수로 쓰이지요. 욥의 아들 딸들의 숫자를 보시며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나요? 아들이 '일곱'입니다. 완전수의 숫자로 있습니다. 딸이 '셋'입니다. 이도 완전수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의 명수를 합하면 무엇이 되나요? 완전수 '열'이 되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욥이 누리고 있는 축복이 완전함과 완전함을 더하여 ’완벽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시면 양과 낙타도 각각 7천, 3천 마리고, 소와 암나귀를 합하면 이것도 1천마리(5백 + 5백)입니다. 가축들의 숫자 자체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숫자들이 상징하는 것은 욥이 그만큼 하나님께 넘치도록 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  주1)   


욥의 자녀들


 무엇보다 1절과 5절은 욥의 성품을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난 자' 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4-5절에 나와 있습니다. 자기의 자녀들이 생일이 되어 파티를 엽니다.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여 신나게 놀겠지요. 파티가 끝나고 아침이 되면 욥은 그들을 다 불러서 영적으로 깨끗케 하는 작업을 합니다. 번제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파티를 즐기며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나 그들이 흥에 취해 잠시나마 하나님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니'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 내 자식들이 혹시 죄를 지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욥은 그저 지나가는 기도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혹시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위해 자기의 재산인 짐승을 죽여 태우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욥이 하나님과 죄에 대해 어느 정도로 민감한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욥의 행위는 항상 이러했다고 말합니다(5절).




천상회의


 여기서 갑자기 장면이 바뀝니다. 이 땅이 아닌, 천상의 세계로 카메라가 돌아갑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1:6-8)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비밀스러운 광경을 욥기 1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천상회의 자리입니다. 그곳에는 여호와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아마 천사들을 가리킬 것입니다)과 사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고, 사탄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어서 질문하십니다.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지금 하나님은 욥을 자랑하고 계십니다. 사탄이 묻지도 않은 욥을 먼저 화두로 꺼내며 그의 충성됨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앞의 본문에서는 욥의 의로움이 하나의 사례로 설명되고 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입으로 "욥처럼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장에서 다른 것들은 다 흘려보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고, 그의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직접 확증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묘사하시며 '내 종'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 자손들에게 사용하신 표현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은 욥을 믿음의 선진들과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주2)   


 그러나 사탄은 여기에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 사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욥기에 나오는 사탄이 하나님의 대적자인 악마적인 존재가 아닌, '고소자'나 '감찰관' 역할을 하는 영적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 주3) 사탄의 대답을 한 번 보실까요?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9-11)


천상회의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동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에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모든 복들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욥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지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 "까닭"들이 사라지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사탄의 주장의 요지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사탄은 그 복들을 '울타리'(10절) 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울타리는 위험으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해주는 안전망이지요. 욥은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 울타리가 깨어지면? 사탄은 자신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할 것입니다.


 사탄의 도발적인 제안은 그렇다 쳐도,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그러면 그렇게 해 봐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허용 때문에, 욥은 이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참혹함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이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내기의 도구로 사용하시다니! 만약 그 당사자가 욥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기독교 작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의 명예를 거셨다. 이제 욥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이 결정되는 것이고, 욥은 그 영광스러운 일에 택함받은 것이다." 주4)


 상당히 신선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쓰임받는 영광'을 위해 욥이 겪어야 했던 처절함을 조금이라도 묵상해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 해석을 100%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요?  어떤 연유라 해도 하나님은 인간을 내기의 도구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까?  욥기는 1장부터 우리에게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던져줍니다.


 일단 우리는 1~2장에 소개되는 천상회의에 대한 해석에서 한 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짧게 소개된 천상회의 장면을 가지고 섣부르게 하나님을 욕하거나, 혹은 억지로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욥기에서 독자들에게 오픈된 천상회의는 그야말로 하늘의 신비 중 극히 일부분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아시지요? 세 개의 시리즈로 나누어진 이 영화는 총 9시간이 넘는 분량입니다. 만약 반지의 제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철수에게, 골룸이 '마이 프레셔스!'라고 소리지르는 3초 정도의 순간만 보여준다면 철수가 이 영화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우주인이 나오는 영화인가?" 라며, 오히려 왜곡된 인상만 갖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소개된 천상회의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신비 중 극히 일부분만 엿보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전히 '미스테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장면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하나의 비밀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욥기가 굳이 이 장면을 독자들에게 공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상회의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욥은 무죄하다'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독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본문을 읽어나가기를 원합니다. 욥이 무죄하다는 사실은 뒤이어 우리가 살펴보게 될 욥과 친구들간의 논쟁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이 전제를 인지한 상태에서 본문을 읽어야 헷갈리지 않고, 친구들이 틀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하여, 천상회의는 인간의 실존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래의 두 주장을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오직 종교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 때문에 종교적일 뿐이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유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지. 제 아무리 종교적인 체해도 결국은 그거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해 신앙을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앙 그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야.”



 상반된 두 주장의 주요 논점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수단인가 목적인가?" 라는 것입니다. 주5) 사단은 '수단'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은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마 정답은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대답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입술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합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경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귀한 자식인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증명해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임에도 아브라함의 그런 행동을 보시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고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수단인가 목적인가?' 우리는 평안하고 풍족하게 살 때는 이 질문에 대해 헷갈려 합니다. 그러나 칼바람이 몰아치는 시련을 맞닥뜨리고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원수들의 적의와 두려움을 경험할 때, 보다 선명하게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오히려 감격의 찬양이 터져나오는 기이함... 이런 것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대답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참혹한 시련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그 누구보다 의롭기 때문이었습니다.  



1)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92

2)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43

3) 하경택, 「질문과 응답으로서 욥기 연구」(한국성서학연구소) p.96

4) 필립 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좋은씨앗) p.211 참조

5) 데이비드 앗킨슨, 「욥기 강해」(IVP) p.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