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Mar 29. 2019

3.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 (1)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선지자 호세아

※ 표지그림 : 앗수르 왕 사르곤 2세, 루브르 박물관


3장도 영화 이야기로 열어볼까 합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의열단’ 단원 김장옥(박희순, 실제 인물 김상옥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은 자금줄을 찾기 위해 조선의 유명한 부호와 접촉하던 도중, 정보가 새나가는 바람에 일본 경찰들로부터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김장옥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고 헛간에 숨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실제로 그는 쌍권총을 들고 탈출하며 수 백명의 경찰들과 싸웠다고 합니다.



 이 때 친일파 일본 순사로 의열단원 체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이정출(송강호)은 경찰들에게 총을 거두게 하고 자신이 설득해 보겠다며 헛간에 들어가 옛 친구였던 김장옥과 직접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정출은 김장옥에게 살고 싶으면 자기와 함께 나가자고 회유합니다.

 “너는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것 같으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



 그러나 김장옥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 기울어진 배에 쥐새끼들이 제일 먼저 나가지. 사람이 어떻게 쥐와 함께할 수 있겠냐”



 그리고 김장옥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맙니다.


 김장옥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나라가 독립을 하느냐 마느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된 이 나라의 진짜 구성원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진짜 백성은 '사람'이고 일제의 앞잡이가 된 자들은 '쥐새끼'입니다. 이 나라가 독립이 된다 해도 '쥐새끼'들은 백성될 자격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자청했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혈통’이라는 기준으로 여호와의 선민임을 자부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진짜와 가짜로 구별된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준은 애초에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그들의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를 정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심판과 멸망 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북왕국의 멸망까지...


 슬프게도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습니다. 북왕국의 중흥을 이룬 여로보암 2세가 죽자 곧이어 피비린내 나는 반역과 쿠데타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아래 정리된 내용을 보시면서 지극히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끔찍한 반역과 내란이 있었을지 상상해 봅시다.

 

ㆍ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즉위 → 6개월 후 살룸에 의해 살해

ㆍ살룸의 즉위 → 1개월 후 므나헴의 공격으로 죽음.

ㆍ므나헴의 즉위 → 10년 통치, 아들 브가히야에게 왕위를 물려줌

ㆍ브가히야의 즉위 → 2년 후 베가의 반역으로 살해

ㆍ베가의 즉위 → 20년 후 호세아에 의해 살해

ㆍ호세아의 즉위 → 9년 후 앗수르의 공격으로 북왕국 멸망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 앗수르의 세력 약화는 일시적이었습니다.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이르러 앗수르는 강대한 제국으로 다시 힘을 떨치고 반세기 가량의 평화를 깨뜨리기 시작합니다. 므나헴 왕은 앗수르를 달래기 위해 막대한 조공을 바쳤으나, 베가는 반앗수르 정책을 펼칩니다.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아람-애굽-북이스라엘의 동맹이 맺어집니다.


 그들은 남유다에도 가담을 요청하였으나 유다 왕 아하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동맹군은 남유다를 향해 총공세를 펼치려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다 왕의 마음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듯" 두려워 떨었습니다(이사야 7:2). 이 때 남유다의 이사야 선지자는 왕에게 믿음으로 용기를 낼 것을 요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마라. 르신과 그가 거느린 시리아인, 그리고 르말리야의 아들이 격분한다고 해서 정신을 잃지 마라. 그들은 연기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이사야 7:4, 공동번역)


 그러나 아하스 왕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앗수르에게 붙으면 되지! 믿을 건 강대국 앗수르 뿐이다.'


 왕의 속마음을 알아챈 이사야는, 앗수르에 붙는 것만은 안된다고 설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전하며 앗수르를 끌어들이는 행위는 민족을 멸망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너와 너의 겨레와 너의 왕실을 치게 하실 터인즉, 그 날은 에브라임이 유다와 갈라지던 날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불행한 날이 되리라. (이사야 7:17, 공동번역)


아하스 왕을 설득하는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의 설득은 실패로 끝납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에 구원을 요청하고 이를 기다렸던 제국의 디글랏-빌레셋 왕은 즉시 군대를 출진시켜 북왕국 대부분의 땅을 점령합니다. 이듬해에는 아람을 정벌해 버립니다. 이제 북왕국에는 한 조각의 땅(사마리아) 정도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앗수르에 서둘러 항복하지 않았다면 북왕국의 멸망은 좀 더 당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왕 역시 정세의 절박함으로 그렇게 했던 것 뿐이었습니다.디글랏-빌레셋이 죽고 살만에셀 5세가 앗수르의 왕으로 즉위하자, 그는 애굽과 손을 잡고 앗수르에 조공을 중단합니다. 이에 살만에셀 5세는 즉각 반역국가를 응징합니다. 기대했던 애굽은 전혀 북왕국을 도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포위를 2년 이상 버터내지만 결국 멸망하고, 북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사마리아의 멸망」, William Brassey Hole


 북왕국의 멸망은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데, 이것은 앗수르의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민의 저항력을 원천봉쇄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북왕국 상류층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사마리아 땅에는 바벨론과 다른 지역사람들이 이주되어 살게 됩니다. 그들은 남아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혼합되어 버렸고 훗날 '사마리아인'으로 불리우는 혼혈민족이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의 신들도 함께 유입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이들을 멸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영토로도 민족적으로도 완전히 끝장나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 열왕기서 기자는 단호한 필체로 서술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고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열왕기하 17:7)


북왕국의 멸망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도, 외교 정책의 실패도, 이웃나라와의 관계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왕국의 멸망을 피해 남유다로 내려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의 기록 하나가 전달이 됩니다. 그것은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쓴 예언서였습니다 (당연히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 그 문서에는 유려한 문장으로, 때로는 시의 형식을 빌려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의 예언 : 북왕국의 배교


 호세아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때 예언활동을 시작해서 그의 활동 무대였던 북이스라엘이 몰락할 무렵까지 활동했다고 합니다. 아모스가 북왕국의 중흥 시절에 나타나 활동했다면, 호세아는 이후 피비린내 나는 반역과 구테타의 시대를 지켜보며 예언을 한 것이지요.

 

「선지자 호세아」, Duccio di Buoninsegna


 호세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매우 독특하고 과감한 형태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혼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결혼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아내"로 삼으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관계에 기초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간음"을 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성실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혼" 즉, 국가적 파멸 뿐이라고 예언합니다.


 호세아서에도 비윤리적 행위와 물질주의, 안일함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그보다 더 집중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배교입니다. 그의 공격 목표는 우상숭배 즉,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분리시킨 모든 질병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실한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hesed)를 요청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종교적, 외적 형식으로만 그것을 대신할 뿐이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 (호세아 6:6, 공동번역)


 호세아는 자신이 직접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살며 하나님의 마음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간음한 여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는 일시적이었고, 난감한 상황을 잠시 빠져나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아모스와 같이 이스라엘 국가에 남은 것은 심판과 파멸 뿐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호세아 6:4, 공동번역)





거친 들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그 파멸이 끝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혼'하고 그들을 멸망시키셔야 하는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호세아 선지자 본인도 수많은 불륜을 저지른 자신의 아내를 값을 주고 다시 사오게 됩니다(호세아 3장 참조). 선지자가 그토록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인간인 나도,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다시 다가가게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실까... 우리가 치명적인 죄를 범했다고 우리를 완전히 버리실까?"


 호세아는 하나님의 자비가 결코 인간보다 못할 수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설령 인간의 헤세드(hesed)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엄밀히 말해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11장에서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타는 듯한 사랑이 분출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 (호세아 11:8~9, 공동번역)


 실제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과 다시 시작할 계획을 알리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새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 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주리라.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 치리라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그 날이 오면, 너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낭군이라고 부르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바알이란 말을 그의 입에서 씻어버려 다시는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리라
....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 (호세아 2:16~22, 공동번역)


 위의 본문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시작하시는 곳이 어디인가요? 공동번역에는 '빈들'로 나와 있고 쉬운성경에는 '광야',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는 '거친 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 라는 이 단어는 주로 성경에서 '광야'로 해석됩니다. 우리가 알듯 광야는 고난과 절망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놓여진 운명도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끝났다고 여기는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새로운 약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비극을 뛰어넘는 소망, 새로운 출발, 새 언약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이제 남유다로 눈을 돌려봅시다. 북왕국의 멸망 이후 남유다는 더욱 힘겨운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태였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 3.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2) 에 이어 계속됩니다

이전 07화 2. 심판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국가(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