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아모스의 예언
※ 표지그림 : 「아모스 선지자」, 구스타브 도레
분열 이후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실정과 아합의 바알 숭배로 위기를 맞이하지만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후의 쿠데타로 인해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여로보암 2세에 이르러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야말로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번영의 이유에 대해 '치명적인 병에 걸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정반대의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신앙적, 사회적으로 죽음의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소선지서로 분류되는 아모스서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남유다 드고아 땅의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로 건너와 예언했습니다!)
아모스는 드고아 마을의 목자였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는 웃시야가 유다 왕이었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었으며, 지진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이었습니다. (아모스 1:1, 쉬운성경)
그는 정식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 자신도 본인이 정식 선지자 출신이 아님을 본문에서 직접 밝힙니다.
...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단지 목자이며, 무화과나무를 기르며 사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양 떼를 치던 나를 불러 내셔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모스 7:14~15, 쉬운성경)
아모스가 받은 단 하나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벧엘의 거대한 산당에서 드려지는 화려한 예배 가운데 나타나 울분을 토하며 메시지를 전합니다.
저자는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의 특성을 고전적(Classical)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후 선지자들이 (근본적으로) 모두 아모스의 내용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분량에 관계없이) 그보다 결코 낫게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모스는 그 어떤 선지자보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윤리적 저항으로 나아갔습니다. 본문을 가볍게 훑어만 보아도 우리는 그 속에 사회적 공의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강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합니다. (※ 앞으로 선지서의 본문 인용은 공동번역을 활용하겠습니다)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가는구나. 너희는 돌을 다듬어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탐스럽게 가꾸고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가 나를 거슬러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죄없는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들아! (아모스 5:7, 10~12, 공동번역)
동시에 그는 탐욕스럽고 안일하기 짝이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책망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마치 노아 시대처럼 임박한 대홍수를 앞두고 먹고 마시는데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의 신랄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저주받아라! 시온을 믿고 안심하는 자들아, 언덕 위에 자리잡은 사마리아를 믿어 마음놓고 사는 자들아, 일등 민족이라고 으스대는 유지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믿고 찾아가는 유지들아,
...
너희가 불길한 날을 밀어내려고 하나, 결국 호되게 맞을 날을 재촉하고 있구나.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 잡아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잡아먹는 것들, 제가 마치 다윗이나 된 듯 악기를 새로 만들고 거문고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 마시며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들. (아모스6:1, 3~6, 공동번역)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엉망인 사회에 종교의식은 가장 성행했습니다. 아모스서의 상당부분이 절기와 제사의 허무함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 되고 있습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공동번역)
종교의 규모가 크다고 사회적 죄악이 치유될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소리칩니다. 공의를 짓밟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종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토해 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적절하지 않습니까?
아모스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ㆍ하나님의 공의로운 법보다 탐욕과 불의를 좇는 사회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ㆍ사회를 치유하기는 커녕 사리사욕을 채우는 교회, 사회에 대한 책망이 결여된 교회는 가짜 교회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회개를 (통렬히 촉구했지만)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파멸의 환상 앞에 아모스의 중보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유예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이킬 의사가 없었습니다. 심판은 확실하고 조만간 도래할 것이라고 그는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무시하고 지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부실공사의 총체였던 것입니다. (아모스 7:7~9)
따라서 아모스는 장차 도래할 파멸을 실감했고, 마치 죽은 자를 대하는 것처럼 심판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슬픔으로 노래했던 것이지요.
처녀 이스라엘이 죽었구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 쓰러진 곳이 타향도 아니건만 일으켜줄 사람 하나 없구나. (아모스 5:2, 공동번역)
하나님의 나라라 불리우는 이스라엘은 멸망의 운명에 처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이스라엘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던 것일까요?
아모스의 예언을 들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 사회가 많이 잘못된 건 인정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셔. 그건 오버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언약으로 선택하셨는지를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말들을 쉽게 할 순 없을거야."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아모스가 기다렸던 말일 수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맹신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약속', '언약'은 셀프가 아닌, 양 당사자간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는 언약의 본질에는 이스라엘의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그분의 공의로운 법을 마음 다해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프러포즈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나는 어떤 시련과 역경이 있어도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비바람이 불때 내가 당신의 우산이 되어 줄 것이며, 광야 길을 걸을 때 마실 물과 지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당신이 싫어한다면 그만두겠습니다. 이처럼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십시오."
이것이 인격적이고 정상적인 청혼 아닙니까? 이제 아래의 다른 청혼을 봅시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내게는 당신의 막대한 재력과 인맥이 필요합니다. 나는 직장에서 성공해야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바쁩니다. 당신을 만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섭섭하지 않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일요일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최선을 다해 짜릿하고(?) 즐겁게 해드릴테니 저를 많이 도와 주십시오."
이런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결혼이 아닌 기계적인 거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셔야 하며 우리는 예배 의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예물로 그분을 섭섭치 않게 해드리면 된다' 는 생각,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어떤 관계를 바라시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이 없는 안일함이 그들의 치명적 질병의 원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회는 병들어가고, 역으로 종교적 행사는 화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다는 백성들이 실제로는 무당 굿해서 귀신을 달래는 이방 종교와 다를 것 없었던 것입니다.
아모스는 택함받았다는 것이 제멋대로 행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이중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특별한 민족이야." 라는 이스라엘의 주장에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반론을 제기하십니다. 만국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 앞에 똑같이 서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티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불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내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아모스 9:7, 공동번역)
아모스는 폭정과 압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선동가도, 사회 개혁가도, 휴머니스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진 고대 신명기의 우물로부터 진리를 퍼올려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8세기의 모든 예언 속에서 가장 놀랄 만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라 주장하는 이들을 버리실 수 있고 또 버리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언약에 기초해 볼 때 이스라엘은 명백한 계약 위반자였습니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날은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저주받아라! 너희 야훼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야훼께서 오시는 날, 무슨 수라도 날 듯싶으냐? 그 날은 빛이 꺼져 깜깜하리라.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집 안으로 피해 들어가 벽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리라.
야훼께서 오시는 날, 그 날이 밝은 날일 줄 아느냐? 아니다. 그 날은 다만 깜깜할 뿐 한 가닥 빛도 없으리라. (아모스 5:18~20, 공동번역)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국이 세워졌을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확실히 그분의 통치에 근접해 있었습니다. 이후 솔로몬의 세속 정치와 국가의 분열을 겪으며 백성들은 국가 체제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저항과 혁명, 숙청으로 국가 체제를 보완해보려 했습니다. 어느정도라도 하나님의 신정 질서와 가까이 가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요? 우리는 이러한 시도들로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와 가까워졌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국가'라는 타이틀 안에 숨어 그 속에서 그분의 보호를 맹신하며 우상숭배와 탐욕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원수들 가운데 속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따름입니다. 아모스는 이런 관점에서 국가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 국가를 거부하되, 완전히 거부하셨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하나님의 언약 대상으로 두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모든 면에서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본서가 집필되던 당시가 냉전의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던 시대였으므로 북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유혹에 더욱 빠질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러시아에는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 국가고 미국은 교회를 가진 고상한 기독교 국가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하고 보호하시리라는 착각 말이지요.
사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 사회 요직에 신실한 기독교인이 세워지고 불신자들을 실력으로 굴복시켜 나라 전체가 기독교화 되는 이상을 우리는 꿈꿨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만들면 사회도 자동으로 교정(?)되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복과 보호를 아끼지 않으시리라는 기대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소망들에 대해 아모스는 철저하게 "아니오"를 외칩니다. 그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국가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불의와 탐욕, 그리고 분열이 넘치는 것을 무시하고 교세와 기독교적 영향력을 키우는데 급급한 사회, 더하여 그런 교세 확장과 화려한 예배로 죄악들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사회가 기대할 것은 멸망과 심판 뿐입니다. 아모스는 정치적 실재들이 아닌 도덕적 실재들에 관해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을 욕되게 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사회가 결코 아니고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저자의 글을 인용하며 2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계속하여 기도한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적절한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순종적인 자녀가 아니면서 감히 어떻게 그것을 기도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한다면, 우리는 또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다.
▷ 3.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1) 에 이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