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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호 Sep 05. 2016

제번(除煩)하옵고

제번(除煩)하옵고

     

세상을 살아오면서 글로 표현할 때는 빈번하게 쓰면서도 말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한문식 우리말 표기 가운데 <제번하옵고>가 있다. 번거로운 인사말을 생략하고란 의미인데 왜 이렇게 쓰이게 되었는지 연유는 알 수 없다. 한영사전을 찾아보면 가관이다. <제번하다>를 `save trouble – 골치 아픈 일은 제쳐두고` 혹은 `be without ceremony – 격식을 차리지 않고`로 번역했다. 비슷하면서도 뉘앙스는 다르다.

         

하여튼 제번하옵고,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골 초등학생 시절 어느 해 추석이 임박했던 때 일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 공부도 하다 말다 하던 어수선하던 어느 날 유엔기구로부터 받은 구호물자가 학교로 전달되어 간단한 학용품이나 장난감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큰 고민에 빠졌다. 구호물자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좋은데 군교육청에서 학교로 지시하여 한 반에 한 학생 이름으로 구호물자를 보내 준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답장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 담임선생님도 영어로 편지를 쓰는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담임선생님이 웬일로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이 연필 한 자루와 그때 처음 보았던 반 자동 연필깎이를 세트로 나에게 주시는 것이 아닌가. 내가 좋아라 그것들을 받아 든 순간 느닷없이 선생님의 엄명이 떨어졌다.

       

 "너 내일까지 영어로 편지 한 통 써 와라 “ 숙제 치고는 너무 황당한 숙제가 아닌가. 우리말로 쓰려고 해도 어려운데 이건 기가 콱 막혀 선물을 받아서 좋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렸다. 어린 마음에 숙제를 할 수 없다는 항명도 못하고 얼떨결에 그냥 집에 돌아와서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래도 지방에서는 유지 집안이고 아버지가 교육자이시니 어찌해서든 숙제를 해서 오겠지 하고 선생님은 생각했을 게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풀이 죽어있는 나에게 할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자초지종 상황 설명을 들으신 할아버지께서는 허허 웃으시더니 무얼 그런 걸 걱정하느냐고 하시면서 당장 말씀하시는 데로 받아 적으라 하셨다.

        

"제번하옵고, 중추가절에 댁내 무고하시며 기체후 일항만강 하옵시고 -----“ 그리고 또 다른 백지에 친절하시게도 먹을 갈아서 붓으로 한문 사자성어 쓰시듯, 당시 안동에 있는 유수 양반 문중에 가서도 뽐내셨다는 일필휘지로 쓰시더니 이것도 편지에 첨부해서 선생님께 제출하라 하셨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숙제를 제출 못하는 것 보다야 낫지. 피장파장이다 “ 하며 잔뜩 주눅 든 얼굴로 한마디 야단쯤 들을 각오를 다지며 편지를 선생님께 제출했다. 편지를 받아 든 그 여선생님께서는 한참 동안 배꼽을 잡고 웃으시더니 하시는 말씀 “야 ~ 정말 명필이시다. 너 숙제하느라 너무 수고했다. 고맙다 “ 그 말씀에 나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번하옵고, 부끄러운 기억도 세월이 흘러 상처가 아물면 추억은 아름답고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젠 무엇이든 <제번하옵고>  아니해도 될 때가 차츰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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