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도, 편지 - 백윤석

by 백윤석

갈 길 바쁜 피난길에 보름달이 찼다지요 눈치 없이, 무람없이 뱃전 왈칵 쏟은 달빛 첨부터 난장입니다, 고개 들 길 없습니다 청상靑孀의 몸, 가린 치마 그 헛헛한 그늘 속에 눈 못 뜬 병아리 둘 그러구러 앉혀 놓고 천자문 쪼는 소리가 돌담 쩌렁 넘습니다 새나가는 등잔불을 길쌈 손끝 움켜쥐고 비단 몇 필 냉큼 끊어 서책과 맞바꾸던 어머니, 눈부신 혜안 햇살보다 밝습니다


땔감 걱정, 끼니 걱정 치마폭 속 가립니다 행여나 알게 될까 바람도 와 입을 막고 내 안에 대竹가 핍니다, 굽힘 없는 대가 핍니다 깊은 속내 못 따르고 훌쩍 키만 자랍니다 각진 모 공글려서 지나새나 공글려서 어사화, 늦게 핀 꽃이 이별 그, 서막이라니 대쪽같이 뱉는 직언直言, 파란 하늘 구름 일고 서슬 퍼런 유배의 길, 어머니 뵙던 날에 재 넘어 배웅하시던 모습, 잊지 못합니다


적소에 달이 뜨면 내 속에도 달이 떠서 자꾸만 그늘지는 마음 한편 다잡고서 긴긴 밤 먹을 갑니다, 동지 밤도 짧습니다 읽으실까, 즐기실까 단숨에 쓴 구운몽을 졸리는 눈 부릅뜨는 호롱불 가다루시는 어머니 웃음소리가 파도로 와 수군댑니다 둥근 달 속 엄니 얼굴 방긋 그리 웃으시던 날, 꿈속에도 그리 그리던 아버지 뵙던 날에 하늘이 울던 이유를 나중에사 듣습니다


처소 심은 매화나무, 생기 돋던 두 그루가 내 대신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습니다 마주한 코앞 육지가 천 길 만 길 거리라니 가을비 천둥번개가 하늘 갈래 찢습니다 열망하던 해배 소식 그 의미도 찢긴 길섶

넋 놓아 울 도리 밖에, 바다 저리 넘칩니다


백윤석, 「노도, 편지」 전문


「노도, 편지」는 서사적 구조화와 양식적 확장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시조로는 긴 편인 11수를 역사적 얼개 속에 엮어가는 상상력의 진폭과 보폭이 활달하다. 존대의 편지투 차용은 여성화자 이상의 곡진한 호소력을 담보한다. 집안 걱정과 쓰는 자의 심정을 유배자의 입장에서 중첩한 효과이기도 하다. - 중략 - 하지만 시적 언술을 각 수에 균질적으로 배분하며 긴 호흡을 견지하는 것은 남다른 형상력이다. 게다가 자유로운 듯한 형태에 일정한 리듬감을 유지하는 율격으로 정형 구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힘도 있다.


유배라는 고도孤島의 고적 속에서도 써야만 사는 쓰는 자의 운명은 7, 8수에 집약된다. “노도에 달이 뜨면 내 안에도 달이 떠서 자꾸만 그늘지는 마음 한편 다잡고서 긴 긴 밤 먹을 갑니다, 동지 밤도 짧습니다”라고, 기약 없는 유배와 문학의 한 절정을 환기한다. 여기서 “달”과 “그늘”과 “먹”은 쓰기의 한 생을 함축하는 외롭고 아름다운 표지로 거듭난다. 붓의 열망을 바탕 삼아 밀고 나아가는 심상들이 전편의 과잉을 제어하며 서정적인 조율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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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는 서포 김만중의 유허지가 있는 남해의 작은 섬이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 외에도 이름난 이들의 유배가 많은 곳이라 유배문학의 산실로 불린다. 역사적 배경과 알려진 인물의 유배와 문학을 다시 엮는 구조라 자칫 넘칠 법한데, 정형이 수위 조절을 견인한 듯하다. -시평 정수자 시인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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