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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와 탁구라켓

by 엉뚱이

사랑하는 나의 라켓이 수명을 다했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나와 함께 했던 탁구 라켓. 몇 달 전부터 목판이 조금씩 뜯겨나가더니, 며칠 전에는 테이블과 부딪혀 왼쪽 모서리 부분이 완전히 뭉개져버린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say good-bye를 하고 다른 라켓을 주문하였다. 수명을 다한 라켓은 5만 원짜리 동호인들이 사용하는 용품으로는 제일 싸구려 품목에 속했기에 이번에는 튼튼하고 조금 고급스러운 10만 원대 라켓을 골랐다.


드디어 새로운 물건이 도착하고 나는 미리 사둔 러버를 부착하였다. 휙휙 휘둘러보니 가볍고 튼실했다. 이제 모두들 다 죽었어~하면서 새 라켓을 장착하고 구장으로 향했다. 역시 새 라켓은 정직했다. 상품후기에 나와있는 글귀처럼 공격할 때는 날렵했고 수비할 때는 믿음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게임은 계속해서 패했다. 이상했다.


쉬는 시간에 라켓을 다시 깎았다(탁구 라켓을 손가락 부분을 정밀하게 플레이어에 맞도록 다듬어야 함). 손에 잘 맞았다. 다시 시합에 나섰으나, 또 거푸 패배... 실력이 갑자기 50퍼센트 정도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몸이 이상하게 라켓을 거부하였다. 팔목만 무지하게 아팠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휴지통에 이전에 버린 수명을 다한 라켓이 눈에 띄었다. 아직 안 버렸구나... 하며 주워들었다. 짜르르하며 어떤 애틋한 감정 같은 것이 라켓 모서리에서 나의 혈관으로 흐르는 듯하였다. 찬찬히 뜯어보았다. 뭉개진 왼쪽 모서리 부분을 좀 깎아내고 울퉁불퉁해진 옆면을 사포로 밀어내면 다시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했더니 생각 외로 훌륭한 재활용 라켓이 재탄생하였다. 비록 모서리가 약간 이지러진 모양이기는 했으나 전체 모양은 큰 상관은 없었다. 다음날 저녁, 새 라켓과 재활용 라켓을 들고 다시 탁구장을 찾았다. 만만한 회원 한 명을 파트너로 삼아 다시금 라켓 적응 시간을 가졌는데, 역시나 새 라켓보다는 재활용 라켓이 몸에 착 붙었다. 그날의 시합은 당연히 100% 위닝이었다.


그런데 새 라켓은 소재부터 형상까지 모두 최고인데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라켓 손잡이 부분이 새 라켓과 헌 라켓보다 약간 길었다. 10년 동안 나의 몸은 헌 라켓의 길이에 맞추어 움직여 왔기 때문에 아주 미세한 길이 차이도 용납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부부 사이도 그런 것 아닐까? 수십 년 동안 같이 지내온 부부에게는 평소와는 다른, 약간의 차이나 미세한 조정조차 눈에 확 띄고 그것에 불편해한다. 잘 적응이 안된다. 그렇기에 서로 다름이 있다면 적응 기제를 발동하여 빨리 동화하거나, 아예 다름 자체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처음 결혼했을 당시 우리는 서로에게 새 라켓이었다. 툭하면 상대방의 각진 모서리에 다치고 거친 골무에 피를 흘렸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적응의 날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은 조금씩 무디어져 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알맞은 정도의 두께로 맞추어져 갔다.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 부부는 적절하게 맞추어진 헌 라켓이 되었다. 역시 라켓도, 부인도 조강지처가 좋은 것 같다.(가끔 요즘도 예쁘고 세련된 새 라켓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 숱한 적응기간을 감히 감내하기가 두려워 눈길을 거둔다)


부부간의 사랑이 뭐 별거더냐. 서로에게 각 세우지 말고 결 따라 맞춰나가면 될 것을...


-2021. 2월 어느 날, 용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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