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나물시루 이론
어렸을 적 외갓집을 가면 항상 안방 구석에 통이 하나 있었어요. 그곳에는 알 굵은 콩나물들이 대가리들을 빽빽하게 맞대고 자라고 있었지요. 어린 마음에 할머니에게 이거 언제 먹어?라고 콩나물 몇 개를 뽑을라치면 할머니는 내 손목을 때리며 "커야 먹지" 하며 시루 뚜껑을 덮곤 했지요.
그래서 저는 콩나물 크는 것을 보려고 하루 종일 시루 통을 들여다보았지만, 이놈의 콩나물들은 지들끼리 종알종알 대화를 하느라 도무지 키 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며칠 뒤 시루를 열어보면 어느새 완벽하게 자란 콩나물들이 쭉쭉빵빵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죠.
필자가 모신 CEO 중 두 가지 유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교육비를 투자하는데 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느냐고 채근대는 유형이었고, 또 하나는 그저 바라보는 유형이었지요. 첫 번째 유형의 CEO를 모실 때에는 온갖 통계량과 보고서들을 작성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두 번째 유형의 CEO에게는 아예 그런 보고 자체를 하지 않았어요. 그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두 번째 CEO에게 업무보고를 할라치면 그분 질문이 이래요...
"요즘 뭐 하고 있어?" "아, 그래? 직원들이 그거 좋아해?"
"직원들은 교육받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해?"
"이제 앞으로 무얼 할 건가?" "그건 왜 하는 거지?"
질문도 두리뭉실하죠? ㅎㅎㅎ
그런데 개인적으로 돌이켜보면, 두 번째 유형의 CEO가 더 두렵고 힘들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의 CEO에게는 자료와 데이터만 보고하면 나의 책임은 어느 정도 면했기 때문에 소위 '일하는 모습'만 보이면 되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유형의 CEO는 아예 나의 마음속에 턱 하니 들어와 앉아 나를 감시(?)했기에, '일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일의 목적에 맞게 일하는 것인지'를 늘 자기 검열하게 했어요.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그분의 인재 육성에 대한 철학이 바로 '콩나물시루 이론'이었어요. 즉, '진득하게 기다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다 자라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놈의 콩나물시루 이론은 두리뭉실해서 직원들의 역량이 얼마큼 성장한 것인지 중간에 콩나물 빼서 보듯 비주얼 하게 샘플링할 수도 없고 교육담당으로서 참 암담하고 어려웠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직원들의 반응이나 후일담을 들어보면 콩나물시루 이론 CEO 계실 때가 생각이 더 많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자신들이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고요.
그 이유는 바로 그분의 질문, "Why?" 였던 것 같습니다.
이 CEO는 물 뿌리듯 "왜?"라는 질문만 던지고는 콩나물시루 뚜껑을 덮어놔 버립니다. 직원들은 콩나물 대가리 맞대듯 머리를 맞대고 "도대체 이 일의 의미가 뭐야? 이것의 근본은 대체 무어 야?" 라며 뽀글뽀글 거품을 입에 거품 물고 밤새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그 와중에 콩나물이 자라듯 측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성숙한 것이겠죠.
물론, 인재육성이라는 일도 경영 활동인만큼 어느 정도의 지표 관리와 진단, 평가 등의 측정 관리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인 것은 직원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 이슈나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교육받았어?'가 아닌 '얼마나 깊이 생각하게 했어?'라는 접근이 바로 이 콩나물시루 이론의 큰 특징인 것 같습니다.
리더의 가장 큰 책임 중 하나가 바로 직원을 육성하는 것입니다. 아, 교육 조직에 맡기면 된다고요? 천만에요... 저같이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저 support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육성은 현업 리더의 일입니다. 천천히, 콩나물에 물 뿌리듯 직원들을 육성하세요. 못한다고 너무 채근하지 마시고요. Why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고민하게 하시면, 어느새 자라 있을 거예요.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9월 용모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