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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틀란 Jan 29. 2021

정말 인생에 대한 희망일까,
이정선의 같은 하늘 아래

기타소리

내손으로 만들어본 악기였다. 나일론 줄 두 개와 길쭉한 베니어나무판자였던 것 같다. 삼촌에게 못 박아달래서 줄을 감아 당겨서 양쪽을 묶었다. 목에 걸 수 있는 긴 줄은 엄마에게 도움을 받아 털실로 떠서 만들었다. 튕기면 ‘띵 뚱 띵 둥둥’ 둔탁한 소리가 났다. 울림통은 생각 못했지만 꽤 오래 곁에 두었다. 손으로 당겼다가 놓으면 외롭지 않았다. 폐렴으로 유치원 입학을 포기하고 벽에 걸린 원복만 하염없이 보아야 했던 나름 인생의 좌절과 처음 부딪쳤던 어린 날, 마음을 달래준 친구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쯤 임시교사일을 하게 된 엄마는 당시 풍금이라 부르던 올갠을 들여왔다. 건반이 노랗게 누군가의 손을 오래 거쳐서 길이 나 있었다. 동생은 열심히 배웠지만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건반보다 현이 좋았다.      

듣기만 하면 편안해지는 기타소리가 있다. 기타교실 책을 몇 권씩 낸 이정선의 기타소리다. 뭉클거린다. 누군가는 ‘혼자 외롭게’ 기타를 연주한다고 표현하지만 그 표현은 틀렸다고 여긴다. 사람과 기타가 함께 들려주는 소리다. 사람과 악기가 협업을 한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별로다. 그런 뜻에서 이정선은 분명히 악기의 마음을 아는 연주자다.      

이정선의 노래들을 거의 다 좋아한다. 그중에서 들을 때마다 건조한 가슴이 촉촉해지는 노래는 따로 있다. 인간과 세상이 서로의 마음을 몰라줘서 안타까운 심정을 가만가만 읊조린다. <같은 하늘 아래>다.  

 (조하문, 임영웅도 불렀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좋아

가까이 그대 느끼며 살았는데 갑자기 보고 싶어 

행여 그대 모습 만나게 될까 혼자 밤거리를 헤매어봐도

그댄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보이는 것은 가로등불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렇게 문득 그대 보고 싶을 땐 우리 사이 너무 멀어요     


잊은 지 오래된 그리움의 세포가 꿈틀거린다. 기억 속 공간 어딘가에 있던 누군가와 무엇들이 막 올라온다. 현실에서는 놓쳐 버린 그들이다. 어려울 것 없는 노랫말은 사람들이 각자 고개 끄덕이게 하는 공감의 영역에서 멜로디가 만드는 길을 따라 그들을 만나러 가게 한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는 18년동안 꾸준히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나온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어지지 않는 평범한 결혼에의 욕망은 급기야 승화시키기도 한다. 단념이라는 처절한 고통에 자신을 맡기면서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니나를 사랑한다나는 절대 잃을 수 없는 새로운 순화된 방식으로 니나를 사랑한다나를 구원한 그 고통에 대해서 니나에게 감사한다남아있는 것은 이 새로운 밝은 기분의 어두운 밑바닥인 체념의 슬픔이다니나는 내가 가지려했고 되기를 원했던 모든 것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그렇게라도 항상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니나는 생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세월이 흘러서 병에 걸려 죽음직전에 슈타인은 말한다. 니나를 향한 그리움과 두려움이 여러 해동안 격렬한 투쟁을 벌여왔고 니나를 얻을 기회도 있었지만 정작 놓친 이유는 니나만큼 자신도 속박을 두려워한 것이라고.     


10년 전에는 나 자신을 지금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강렬한 가정의 폭발이 니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니나를 얻기 위한 투쟁은 한 특별한 여성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하나의 특수한 방향으로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려는 투쟁뿐이었다본질의 이런 저런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었다니나는 나 자신에게서 부인하려고 한 이런 저런 부분과 가능성의 회신이 아니었을까  

   

친척인 아네트 아주머니가 ‘아주 많이 산’경험으로 들려준 니나를 향한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정말 <인생에 대한 희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정선의 기타와 솜이불처럼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엇인가를 향한 그리운 감정이 여전히 올라온다. 이것도 ‘인생에 대한 희망’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어휘로 정의하기에는 그립고 애절한 것들이 아직 많다. 사실,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다. 


어두운 방 한 켠에 놓인 먼지 쌓인 기타를 꺼내 어린 날처럼 껴안으면 어떨까. 또 그리운 것들이 새롭게 얹혀 질 것이다. 또다시 ‘문득문득 보고 싶고 우리사이가 너무 먼 것 같아도’ 슈타인처럼 포기할 수 없다.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기타리스트는 기타와 함께 연주하지만 나는 내 기억과 함께, 삶을 연주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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