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내가 필기를 사랑하는 이유
학창 시절의 나는 소위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한 번도 야간자율학습에 빠져본 적 없고, 선생님께 주저 없이 질문하며,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학생. 잘하면 100점, 못해도 90점을 맞았다. 거의 모든 과목이 1등급이었다. 시험 점수를 들은 주변 어른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좋다'며 칭찬했다. 엄마는 이렇게 표현하셨다. “네가 해보고 싶다는 피아노, 바이올린, 태권도, 검도, 미술, 도자기, 힙합 댄스까지 다 시켜봤지만, 너는 개중에 공부를 제일 잘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다는 칭찬은 가당치 않다. 고백하건대 나는 중학생 때 배운 확률 계산조차 잘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나의 재능이 공부라고 말씀하신 엄마도 잘 알고 계셨다. 많은 부모가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요.”라고 말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나는 ‘머리는 안 좋은데 어떻게 공부는 좀 하는 애’였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 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좋은 줄로만 알았다. 현실을 깨친 건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학교 시험에선 이전처럼 높은 점수를 얻었으나, 모의고사에선 영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배운 내용을 공책에 정리하며 공부했던 나는 공책에 직접 쓰고 적은 내용만 알았다. 그런데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문제를 출제하는 학교 시험과 달리, 학습 능력 전반을 평가하는 수능은 출제 범위가 무척 넓었다. 차마 공책에 다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마디로 나는 응용 능력이 빵점이었다. 만약 수능에 명명백백한 출제 범위가 있었다면, 내 수능 점수는 훨씬 더 나아졌으리라.
그러므로 머리가 안 좋은데도 공부가 재능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필기(筆記) 덕이다. 보고 들은 것을 문자로 옮겨 쓰는 행위이자 연필, 펜 등의 필기구를 이용해 손으로 적는 행위. 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공책에 옮겨 적는 아이였다. 수업이 시작되면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손을 바삐 움직였다. 선생님 말씀을 얼마나 놓치기 싫었으면, 그 시절 아이들의 낙이라고 할 수 있는 잡담이나 몰래 주고받는 쪽지를 싫어할 정도였다. 수업이 끝나면 퍽 뻐근해진 손아귀를 풀며 뿌듯해하곤 했다. 쉬는 시간과 야자 시간에는 빼곡히 받아 적은 내용들을 내 글씨로 정갈하게 옮겨 적었다. 내용을 정리하고, 중요한 부분은 강조해가면서. 보고 들은 걸 공책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절로 내 것이 됐다. 선생님들도 사람인지라 알게 모르게 시험에 나올 문제를 강조하며 가르치신다. 선생님의 농담 한 줄까지 모두 받아 적었으니, 시험 문제를 잘 알아차릴 수밖에.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좋아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머리는 나쁘지만, 솔직히 말하면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정확히 해두자. 좋아하는 건 공부, 사랑하는 건 필기다. 필기를 사랑하다 보니 공부가 좋아졌다. 필기는 매력적이고 대단한 행위다. 머리 나쁜 나를 범생이로 만들어준 은인이라 이렇게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해는 금물이다.
필기는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 필기구가 종이 위를 스치는 감촉, 글씨로 바뀌는 손의 움직임, 한데 모인 글씨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내용은 내적 평화를 가져온다. 평화를 즐기며 종이를 글씨로 가득 채웠을 뿐인데, 만족감과 뿌듯함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손으로 필기할 때 나는 소리들을 모아둔 유튜브 영상이 인기를 끄는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도 유용하다. 잔뜩 부풀어 오른 감정을 손으로 옮겨 적는 것만으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다. 한편, 필기는 수양의 도구이기도 하다. 손으로 오랜 시간 필기하려면 어느 정도의 근육과 고도의 정신력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잘못한 학생에게 내렸던 ‘깜지’라는 벌도 수양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납득이 간다. 깜지는 종이 한 장을 반성문으로 빽빽하게 채우는 벌이다.
필기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글씨 그 자체에 있다.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 서여기인)는 말이 있을 만큼, 하늘 아래 같은 사람 없고 같은 글씨도 없다. 같은 내용을 보고 들어도 사람마다 적고 쓰는 방식이 다르다. 글씨 크기, 기울기, 눌러쓰는 힘, 단어 사이의 여백,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 위치 등 많은 요소가 글씨의 고유함을 결정한다. 또 사람마다 글씨가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사람의 글씨도 기분에 따라, 그리고 나이 듦에 따라 달라진다. 기분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의 글씨를 비교해보면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기울기도 다르고, 눌러쓰는 힘도 다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내 글씨는 획이 제각각 연결되지 않고, 기울기가 심해지며, 종이가 움푹 들어갈 만큼 세게 써진다. 몇 년 전과 지금의 글씨도 다르다. 또박또박 힘주어 쓰던 때도 있고, 둥글둥글 부드럽게 쓰던 때도 있다. 이렇게 보면 글씨는 정말 그 사람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글씨를 사건 해결의 객관적 증거로 쓰기도 하고(필적 감정), 글씨로 사람의 성격도 연구하는 것일 테다(필적학).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손 필기가 낯설어진 세상이다. 손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도구가 많아진 탓이다. 키보드를 이용해 적으면 손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더 많은 내용을 적고 정리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학에서는 교수님의 수업 자료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는 손으로 무언가를 적는 행위 자체가 따분하고 번거로운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을 담아 씀으로써 나를 다스리는 경험만큼은 모두가 겪어보기를 소망한다. 조선의 왕들은 국정을 돌보면서도 글씨 쓰며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좋은 왕, 나쁜 왕 할 것 없이 그 시대의 지도자들은 모두 명필이다. 그들처럼 꼭 명필이 돼라는 건 아니다. 필기와 멀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자주 쓰고 적는 습관만으로 충분하다. 글씨는 쓰다 보면 바르게 되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질리지 않고 꾸준히 해내는 것도 없고, 특별히 잘하는 분야도 없는 내게 필기는 취미이자 특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누구나 조금씩은 쓰고 적으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필기의 가치를 받들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더는 그 가치를 축소하지 않으련다.
“저는 취미도 필기고, 특기도 필기입니다. 필기하려고 공부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공부까지 사랑하겠어요, 필기를 사랑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