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부릉이’가 바꾼 삶의 모양
100만 원짜리 전동 스쿠터를 샀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그런 오토바이는 아니다. ‘부릉이'라는 귀여운 별명이 더 잘 어울리는, 어쩔 땐 날쌘 자전거보다도 느린 이륜차다. 다리 수술 이후, 거동이 불편해 전동 스쿠터를 구매했다. 자동차 운전 실력도 미덥지 않거니와 주로 집 근처에서 생활하는 프리랜서인 나에겐 딱 ‘부릉이’ 스쿠터가 제격이었다.
전동 스쿠터가 편한 이동에 도움이 되리란 건 알았지만, 부릉이의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부릉이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굳어져 버린 삶의 모양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었다. 도대체 전동 스쿠터가 내 삶의 모양을 어떻게 바꾸었다는 걸까?
첫째, 일상의 영역
영화 <인 타임>에서는 시간이 곧 화폐다. 커피 한 잔을 사려면 4분을, 스포츠카 한 대를 사려면 59년을 지불해야 한다. 사람들은 노동의 대가로 시간을 받고, 그 시간으로 목숨을 연장한다. 시간이 시간을 버는 세상이다. 부자들은 100년, 200년을 살고, 빈자들은 하루하루를 겨우 생존한다. 부자들은 여유롭게 걸어 다니지만, 빈자들은 절대 걸어 다닐 수 없다. 1분 1초를 아끼려면 뛰어다녀야만 한다. 영화 속에는 남은 시간이 1시간 30분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 2시간 거리의 약속 장소로 뛰어가다가 목숨을 다해 죽는 장면도 나온다. 버스를 타면 30분 안에 이동할 수 있었으나,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1시간 30분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했다. <인 타임>은 이러한 에피소드를 모아 시간의 가치를 역설한다.
갑자기 왜 영화 이야기를 꺼냈느냐 하면, 부릉이를 타고 다니면서 <인 타임>이 꼬집은 시간과 돈의 강력한 상관관계를 얕게나마 실감했기 때문이다. 월급 생활자가 아닌 노동자에게 시간은 돈이다. 일하는 시간만큼 돈을 번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시간을 돈으로 바꾸어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고, 어떻게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뚜벅이'였던 내가 특히나 아까워했던 시간은 이동 시간이었다. 길거리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걷는 건 공짜니까 손해는 아니지 않느냐고? 돈은 내지 않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쓰기에 절대 공짜라고 할 수 없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았으나, 결국 시간을 다 써버려서 죽음을 맞이한 <인 타임>의 인물처럼 말이다. 현실의 사례를 떠올려 봐도 마찬가지다. 티끌도 쌓이면 태산이 된다고, 뚜벅이가 길거리에서 소비하는 시간은 상상 그 이상이다. 걸어서 매일 왕복 1시간 거리의 카페를 방문한다고 해보자. 매일 왕복 1시간이면 한 달에 30시간, 최저 시급으로만 계산해도 도합 30만 원가량을 길에 버리는 셈이다. (걷기가 가져다주는 체력 증진이라는 이익은 제외하고 생각하자.) 물론 모든 행위를 경제적 개념으로 치환하는 건 무척 삭막한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논리에 세뇌된 두뇌는 ‘먼 거리의 카페에 갈 바에야 시간과 체력을 모두 아낄 수 있는 집 근처 카페에 가는 게 낫다’며 스스로 합리화하고 경험을 제한했다.
그런데 부릉이 덕분에 더는 이동을 포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걸어서 30분 거리의 카페에 5분이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물리적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동네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길눈도 밝아졌고,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도 생겼다. 여전히 자주 가는 집 앞 카페가 있지만, 새로운 카페를 탐색하는 시도가 전보다 늘었다. 어디로 이동하든 시간과 체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어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일상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낀다. 이런 경험들은 조금씩 축적되어 다시 새로운 일을 해낼 원동력이 된다.
같은 시간에 더 먼 거리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경쟁력이다. 체력 소모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역시 경쟁력이다. 경쟁력이라는 표현이 과연 올바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동의 자유는 돈과 강력한 상관관계에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돕고, 언제나 자산이 되는 풍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니 경쟁력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시간도 아까운데 굳이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은 ‘시간도 별로 안 드는데 기꺼이 나갔다 오자.’로 바뀌었다. <인 타임>에서 돈으로 시간과 목숨을 산 것처럼, 나도 약간의 돈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샀다.
아직 우물을 탈출한 개구리라고 말하긴 어려우나, 부릉이 덕분에 우물가 개구리 정도로는 발전한 건 분명하다. 지금은 우물가를 탐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넘친다.
둘째, 사유의 시간
가끔 과거의 시대로 돌아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과학 기술이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던 과거에서 한없이 사유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 발전한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반성하고, 예측하고, 분별하고, 전망하며 성장한다. 사유 없는 세상은 결국 망가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에도 과학 기술의 산물들이 펼치는 온갖 방해 공작을 물리치고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그러나 모두가 잘 알겠지만, 스마트폰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소망하던 과거로의 회귀를 돕는 게 부릉이일 줄 누가 알았을까? 헬멧 쓰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행위가 이토록 풍족한 사유의 시간을 제공할 줄이야. 부릉이를 타고 처음으로 1시간 거리의 영화관에 가려고 길을 나선 날이었다. 아무리 부릉이가 귀엽고 깜찍한 별명을 가진 이동 수단일지라도, 나름 이륜차 아니겠는가. 시속도 최대 35km까지 올라간다. 딴짓 말고 운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소리다. 초보 라이더 주제에 음악이나 라디오를 들을 생각은 금물이다. 까딱 잘못하면 황천길 직행이다. 어쩔 수 없이 운전에만 오롯이 집중하려는데, 무료함에 사무치는 순간들이 자꾸만 찾아왔다. 한없이 달리기만 하는 직선 도로에서, 청색 신호로 바뀔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적색 신호에서 특히 그랬다. 무언갈 해서도 안 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눈앞의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보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머릿속 생각들을 구태여 곱씹어보는 수밖에.
그러다 문득 이렇게 짬이 나는 시간을 그대로 두어본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여유에도 무엇이든 하려고 애써온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할 게 없으면 스마트폰이라도 드는 삶이었다. 사유는 여유에서 피어난다는 깨우침이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피부에 스몄다. 그렇게 덧없이 달리고, 서고, 달리고, 서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들로 채워졌다. 부릉이를 산 이후, 사유는 내 일상을 채우는 어엿한 한 조각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생겼다. 이제야 비로소 말이다.
일상의 영역과 사유의 시간 말고도 부릉이를 타며 바뀐 삶의 모양이 또 한 가지 있다. 부릉이를 타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건다. 특히 동네 할아버지, 아저씨들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다. 잠시 신호를 기다릴 때면, 동네 사람들이 슬쩍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다. 전동 스쿠터의 성능과 가격을 묻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멋지다며 엄지를 척 올려세워 주는 분들도 있다. 왕년에 도로 위를 좀 누볐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옛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부릉이를 매개로 동네 사람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괜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외지에 나와 살면서 동네 사람들과의 소소한 교류를 늘 꿈꿨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드문드문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 어쩌면 부릉이가 바꾼 삶의 모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두 갈래로 나뉜다. 무언가를 경험하기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 자가용의 맛을 이제야 알았다니 통탄스럽다. 부릉이가 제 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삶의 모양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야겠다. 그다음엔 자동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