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추하지 않은 어른 되기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빗줄기를 뚫고 한 행사장에 모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몇 년 만에 열린 지역 축제였다. 비를 맞아도 감기 걸릴 걱정 없는 꿉꿉한 여름날이었고,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기꺼이 비를 맞으며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취재를 위해 축제 현장에 방문했다. 개막식 행사를 참관하고, 몇 장의 현장 사진을 찍는 것이 나의 과업이었다. 현장 곳곳에는 행사가 시작하면 우산을 접어달라는 당부의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넓은 들판에 간이로 마련된 행사장이었기에 관객들이 우산을 쓰면 개막식 관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축제 측은 입장객에게 무료로 우비도 나누어주었다.
일찌감치 행사장에 도착한 나는 무대와 적당한 거리가 있는 뒤쪽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장을 전체적으로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앞쪽 좌석부터 차근차근 관객들이 들어섰다. 행사 시작 10분 전,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행사가 시작할 모양이었다. 카메라를 높이 치켜들고 현장의 모습을 담았다. 몇몇 관객들의 우산이 프레임에 담겼다. 그럴 수 있지, 아직 행사가 시작하기 전이니까. 행사 시작 후, 모두 우산을 접으면 그때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대 위에 사회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빗방울 사이로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환호성이 개막식의 시작을 알렸다. 관객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오래간만에 열린 지역 축제를 즐겼다. 그러나 나는 축제를 즐길 수 없었다. 무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활짝 펼쳐진 바로 앞자리 관객의 우산이 내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하늘 위로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려 사진을 찍으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앞에 앉은 그 관객의 우산이 프레임에 걸렸다. 그 사람은 우비를 입고 있으면서도 우산을 접지 않았다.
평소라면 더러운 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자리를 옮겼겠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나에게는 이 자리에서 해내야만 하는 과업이 있었다. 심지어 내 목에는 정당한 취재의 권리를 보장하는 배지도 걸려 있었다. 빗줄기를 가르고 전방을 향해 입을 뗐다. “저기요.” 그러나 내 목소리는 허공에서 가볍게 흩어지고 말았다. 비가 내리는 야외 행사장에서 이 정도 크기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크게 외쳤다. “저기요!” 이번에는 앞자리 관객을 포함해 근처의 다른 관객들도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모두 우비를 입었으나, 우산을 접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우산 때문에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데, 우산을 좀 접어주시겠어요?”
머쓱하게 우산을 접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원래 타깃이었던 앞자리 관객은 이렇게 답했다. “우산을 접으라 마라야. 앞에 자리도 많구먼. 그럼 앞에 가서 앉든가.” 그 앞의 또 다른 관객은 이렇게 답했다. “비 오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우산 쓰고 있잖아요.” 나머지 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대차게 째려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우산을 쓴 채였다. 단 한 사람도 우산을 접지 않았다. 마음속에 ‘참을 인’ 자를 수십 번 휘갈겨 썼다. 있는 힘껏 팔을 뻗어 셔터를 다시 눌러봤으나, 역시나 칙칙한 우산들만 찍힐 뿐이었다. 십분 남짓을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지나가는 남성 자원봉사자를 붙잡았다. 젊은 여성의 말이라 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나의 부탁을 무시한 세 명의 관객은 모두 남성이었다). 우산으로 인해 무대가 가려지므로 행사 중에는 우산을 접어달라는 축제 측의 권고 사항을 다시 한번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우산을 쓰고 있으니 나도 배려할 필요 없다는 논리를 펼쳤던 관객과 힐난의 눈초리로 답변을 대신했던 관객이 드디어 우산을 접었다. 그런데도 우산을 접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시야 확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바로 앞자리 관객이었다. 그의 자존심은 접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산처럼 꼿꼿했다. 그는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우산을 쓰기 위해서인 양 고집을 부렸다. 그의 친구로 보이는 옆자리 관객이 우산을 접는 게 어떠냐고 슬쩍 권유했지만, 그는 우산을 쓰는 게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투덜거리며 우산을 고쳐 들었다. 다분히 나를 향한 비난이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저지할 만한 더 높은 직위의 사람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행사를 관람해도 모자랄 판에 비상식적인 상황으로 인해 자리를 떠야 한다는 게 무척 화가 났다. 마침 현장을 진두지휘하던 관리자 직급의 관계자를 찾았고, 그분께 상황을 설명하고 조치를 요청했다. 관리자가 단호하게 우산을 접을 것을 요구하자, 그 사람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옆자리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가자고. 에잇, 이런 행사 더 봐서 뭐 하나. 우산 쓰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날의 경험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는 무사히 마쳤으나, 충격에 휩싸인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우산을 접어달라는 상식적인 부탁에 대해, 마치 납득이 어려운 요청을 받은 것처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류애의 상실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어른들이 하필 그날 내 앞에 쪼르륵 앉아있던 것이 우연은 아닐 테다. 같은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어른이 되면 저도 모르게 권위 의식이 생기고 만다. 안 그러려고 해도, 한 살씩 늘어가는 나이가 권위라는 착각을 부여한다. 권위 의식에 사로잡히면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합리화에 빠진다. 권위 의식에 사로잡히면 자기 판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확신도 커진다(이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꼰대’ 기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나이가 많아도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추하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다.
“요즘 애들은 문제”라는 말로 어린이들의 버르장머리를 지적하는 어른들이 많다. 그런데 가만 보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무례하다. 아이들을 훌륭한 어른으로 키우고 싶거든, 먼저 예의와 배려를 갖춘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추하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가려면, 나이 듦과 함께 찾아오는 권위 의식과 의식적으로 멀어져야 할 것이다. 배려할 줄 아는 어른, 공동체 질서를 지킬 줄 아는 어른, 상식이 통하는 어른, 잘못을 인정하고 기꺼이 사과하는 어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 때문에 인류애를 잃어버렸는데, 상식을 좀 가져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