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함의 양면성
남편은 내가 처음 만나본 ‘미대 남자’였다. 예고를 졸업하고 서양 회화과에 진학한 미술학도였지만 나를 만났을 때는 대학원에서 UX 디자인을 전공하고 관련 업종에 취직해 평범한 직장인이 된 후였다.
지금의 남편을 친구들에게 소개한 뒤 심심치 않게 들었던 얘기가 ‘미대 남자는 너무 어렵지 않을까?’였다. 나나 내 친구들이나 주변에 예술학도가 없기도 했고 예술가에 대해 쉽게 가지는 편견이 ‘괴팍하다’ ‘자기 세계가 강하다’ ‘예민하다’ 등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예민한 건 맞는 것 같았다. 바로 감수성이.
넌 꼭 나보다 섬세한 남자 만나라
대학시절 첫 번째 연애 끝에 들었던 말이다. 8개월을 만났지만 그 사이 두 번이나 헤어졌다 다시 만난 파란만장한 연애였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로서는 부담스러울 만큼 매사에 의미부여를 했다. 쓸데없이 진지했고, 과민하게 경계를 세우다가도 과도하게 낭만을 부렸다. 남자친구의 일촌신청을 수락하는 게 뭐 그리 고심해야 할 문제라고 몇 날 며칠을 졸라대는 그 친구 속을 어지간히도 태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도 제기분에 취해 간식거리를 사들고 석사과정 중이던 그의 연구실에 깜짝 방문을 하기도 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봉창 두드리듯 ‘네가 언젠가 나를 지금만큼 좋아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렵다’며 여기서 끝내자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그 친구는 혼비백산 택시 타고 서울에서 수지까지 달려오곤 했다. 겉으로는 내가 그 친구를 휘두르듯 보였지만 사실 상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기분을 송두리째 지배당한 쪽은 나였다.
우리의 연애가 그야말로 진이 빠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을 때, 내 못된 버릇이 도졌다. ‘이럴 거면 헤어져’를 (또) 시전 한 것이다. 그날은 그가 날 잡지 않았다.
“그래. 그만하자.”
그렇게 단칼에 결론을 내고 헤어짐을 향해 한마디 한마디 거침없이 행군하던 그의 말이 마침내 화룡점정을 찍었다.
“다음번에는 꼭 섬세한 남자를 만나. 널 다 받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자기한테 같이 시를 쓰쟀나, 문학에 대해 토론을 하자 했나.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어달랬나!!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눈이 시리도록 명백한 백기를 흔들고 이 연애에서 회군하는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조언인지 예언인지 몰라도 네 말대로 됐어
남편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구남친의 그 말을 떠올렸다. '감당하기 힘든 소녀감성'으로 치부되었던 나의 섬세함이 적당한 가벼움과 원만한 사교성으로 대체되어 갈 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 가장 섬세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하루는 데이트를 하려고 만났는데 둘 다 모자를 쓰고 나온 적이 있었다. 길을 걷다가 귀여운 강아지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얘기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모자 챙이 서로 부딪힐뻔했다.
“와, 이것 봐. 너랑 내가 손을 잡고 걸으니 모자도 닿을 정도로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거야.”
“아, 그런가. 근데 우리 둘이 키가 거의 비슷해서 닿을뻔했다는 생각은 안 드니.”
오글거리는 걸 못 견디는 나는 늘 농담이랍시고 밉살스럽게 받아친다. 하지만 그는 이런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네 눈을 내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아.”
이쯤 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궁리하느라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똑같이 달달한 멘트로 맞장구 쳐주지 않아도, 분위기 깨는 삐딱한 말로 응수해도 데미지 하나 없이 해맑은 사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섬세함이 남다른 감수성뿐 아니라 사려깊음으로 발현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지난해, 내 여동생이 프랑스에서 결혼을 했다. 밤늦도록 파티가 이어지던 피로연장에서 아빠가 대화하느라 식사도 거의 안 하고 있길래 얼른 식사 먼저 하시라고 한 마디 했더니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아빠를 따라 나가 30분 넘게 함께 강가를 산책하며 마음을 달래 드린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아버님이 오늘 하루 종일 언뜻언뜻 울적해 보이시더라고. 아마 막내딸 시집보내시는 게 많이 서운하셨나 봐. 여긴 혼주라는 개념도 없고 뭔가 우리랑 예식문화가 많이 다르잖아. 그래서 어느 시점에 감정을 정리해야 할지 모르셨던 것 같아. 우리 식대로 하면 신부 입장할 때나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마다 ‘아 이제 내가 딸을 보내는구나’하며 감정 정리가 되잖아. 내 생각에는 아버님도 한 번쯤 감정을 터뜨릴 기회가 필요했던 것 같아.”
아빠가 헛헛한 감정을 털어내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나랑 엄마는 아빠가 또 낄 자리 안 낄 자리 안 가리고 주책맞게 수다 떤다며 창피해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말을 듣자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남편에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남편이 '섬세함'이라는 특성을 아름답게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감사했다.
미대든 공대든 인문대든, 남보다 삶을 더 풍부하게 느끼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섬세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진다. 섬세함의 촉수를 남을 향해 세우면 상대를 긴장하게 만들지만 자기 자신을 향해 뻗으면 희안하게 남들도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전자였고, 남편은 후자인 셈이다.
나에게 섬세한 남자 만나라고 해줘서 고맙다, 구남친!